[토요 이슈] 참고서·전문서적 내용 한권에 담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 서울 홍은동 명지고 1학년생들이 15일 오후 학교에서 자체 개발한 교재로 국어 수업을 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거북이가 먼저 출발한 상황에서 아킬레스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리스 철학자 제논의 역설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다. 분명히 틀린 얘기인지 알지만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서울 명지고가 자체 개발한 '명지고교형 수학 교재'에는 이를 숫자로 따져서 반박하는 상세한 설명이 들어 있다. 결론은 '아킬레스의 속도가 거북이의 10배라고 하고 100m 거리를 두고 출발했을 때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9분의 100초(11.1초) 이후에는 따라잡을 수 있다'이다.

명지고의 학습교재는 이런 식이다. 학생이 혼자서도 공부하며 이해할 수 있게 풍부한 예시와 설명을 담고 있다. 분량과 난이도 등 기존 교과서의 제약에서 벗어나 공부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예습중심의 교재라는 게 학교 측 설명이다.

박성수 교장은 "학생이 배워야 할 분야를 다 포함하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료 제시와 설명을 충분히 하려고 했다"며 "내용이 방대해 예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결과적으로 학생 주도의 학습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 어떤 내용 담고 있나=명지고 교재에는 기존의 교과서 내용이 기본적으로 들어간다. 교과서의 단원 순서에 맞춰 더욱 풍부한 보충자료를 만든 것이다. 배병배 교재개발실 부장교사는 "교과서 내용에 대해 핵심정리를 해주고 시중 참고서와 해당 분야 전문서적 등 각종 학습자료 내용을 추가하고 문제.풀이까지 총괄적으로 묶어 재편집했다"고 설명했다.

국어의 경우 먼저 단원별로 교과서 내용의 핵심을 정리한 뒤 어휘 및 구절 연구, 토론 등 학습활동, 보충학습, 내용 이해 확인 문제 풀이 등으로 '완벽한 학습'이 가능하도록 유도한다.

'용소와 며느리바위'라는 단원의 예를 보자. '학습활동'을 통해 이야기를 처음, 중간, 끝의 3단계로 정리하도록 유도하는가 하면 13개의 짧은 문장을 제시한 뒤 이야기를 재구성하도록 유도한다. 글 내용을 신문기사로 바꿔 써보게도 한다. 글을 쓸 때 내용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원리를 파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단원 말미에는 72문항에 달하는 수능시험식 실전 문제를 내고 풀이까지 제시한다.

국사 교재도 시대별로 교과서 본문을 제시하고 내용을 정리한 뒤 심화자료를 제시해 깊이 있는 학습이 가능하다. '고대의 정치'단원의 심화과정에는 '삼국 통일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보충자료를 제시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외교정책과 경제적 토대를 추론해 보라'고 하고 있다. 사료 이해하기 과정에선 '중원 고구려비'가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관련해 갖는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한다.

수학은 '힐베르트의 호텔'등 유명한 예제뿐만 아니라 '수학 이론'과 관련된 역사, 수학자에 대한 이야기 등을 교재 곳곳에 넣어 딱딱한 수학에 재미를 느끼게 했다.

힐베르트의 호텔이란 예제를 보자. '무한개의 객실이 있는 호텔에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는데 방을 내줄 수가 없었다. 모든 방에 투숙객이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베르트라는 종업원이 투숙객들에게 옆방으로 한 칸씩 이동하도록 부탁해 손님을 첫 번째 방에 들어가게 했다'는 내용이다. 무한대에 1을 더해도 여전히 무한대임을 재밌게 설명한 사례로 일반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과학 교재도 기초학습에서 탐구학습 순서로 구성해 이해를 돕는다.

◆ "머리숱이 줄었다"=박 교장 주도로 2003년 초부터 교재 개발이 본격화됐다. 희망 교사 70여 명이 각종 자료를 모았다. 이 중엔 미국 유치원부터 고교 교과서 전체(500여 권)와 일본 고교 교과서(100여 권)도 포함됐다. 지난해 초부턴 30여 명이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사이 교내 변화도 일었다. '못 가르친다'는 소리를 듣던 교사가 교과서를 만들면서 '짱'이라는 말을 듣게 됐고 교사가 달라지자 수업시간 중 잠을 자는 아이들도 점차 줄었다.

교재를 1학년생부터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박 교장은 "아직 가편집 상태여서 손볼 게 많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2년여에 걸쳐 초판을 만든 교사들의 생각도 긍정적이다. 교재개발실 배 부장교사는 "일 시키면 좋다고 할 사람 없는데 선생님들은 긍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강영진 1학년 부장교사는 "원래 머리숱이 많았는데 이 일을 하면서 줄었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불과 한 학기 만이지만 교재 사용에 따른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는 게 학교 측 판단이다. 성적의 경우 일반 학급보다 과목당 9.1~10.9점 정도 높다. 학생들도 흥미를 느끼고 있다. 이민정(16)양은 "호기심에 교재를 배우는 반에 들었는데 스스로 공부를 하게 돼 좋다"며 "일반 교과서를 배우는 친구 중 우리 반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이도 많다"고 전했다.

김남중.고정애 기자 <njkim@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