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본지에 칼럼『주구잡기』를 연재하다 지난해 10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박중희씨 (본사 전 런던특파원)가 최근 퇴원해 그 동안 중단했던 이 칼럼을 다시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편집자>
『돌멩이가 계란에 부딪치면 계란이 깨진다. 계란이 돌멩이에 부딪쳐도 역시 깨지는 건 계란이다.』워낙은 터키속담이란다. 그러나 듣기는 영국에서 들었다. 혹 이게 영국사람이 만들어낸 터키속담이 아닌 가도 의심이 가지만 사실이야 어떻든 상관은 없다.
즐겨 쓰이기는 아마 영국에서 더 했을 것같이 여겨진다. 그게「톱 도그」(직역으론 상견, 의역으로 해서 제일 가까운 우리말은「왕초」.영국사람들은 지난 2, 3백년동안 자기자신들을 세계라는 울타리 속에서의「톱 도그」로 여겨왔었다)의 논리로선 안성마춤이였었을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편리해서 좋았다. 누가먼저 부딪쳤건 계란이 깨지게 마련인 건 대자연의 섭리다. 거기다가 누구의 잘잘못이라든가, 윤리라든가 하는 따위의 인간사를 갖다대고 이러쿵 저러쿵 할건 아니다. 부질없는 일이다. 탈이 없으려면 계란이 돌멩이를 잘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를테면 대영제국 국왕폐하의 함대가 중을 이어 항진해 나간다.
거기다가 누가 그걸 한번 막아보자고 나선다. 그러다가 그렇게 나선 사람들이 불벼락을 맞고 수장이 돼 물밑으로 꺼져버린다. 그러면 런던서구 톱 도그(상속엔 또 상이 있는 법이다)전용클럽의 경자나 작위 붙은 영감들은 안락의자에 묻혔던 등을 잠깐 일으키면서 이렇게 혀를 다시 면됐었다-『사람들이 철이 없어도 분수가 있지. 서로 부딪치면 깨질건 계란이라는 게 뻔한걸 가지고 설나무내…쯧쯧.』
물론 그럴 기회가 많진 않았다. 영국포함이 왔다하면 계란들은 몰지각하지 않게 멀찌감치 길을 피해 얼씬 들을 안 했다. 그래서 영국함대들은 4대양을 좁다하고 누볐고 그러는 동안 지구땅덩어리 4분의 1이상을 뒤덮을 정도로 늘어난 대영제국판도 위에선 하루종일 해가 떨어지질 않게 됐었다.
그게 얼마 전까지의 일이다. 삼투를 튼 우리 할아버지들이 만세를 부르고 나서던 3·1운동 때까지 만해도 영국은 자그마치 1천3백50척의 군함으로 된 세계최대최강의 해군을 가지고있었다.
그리고 대영제국이 해외에 깔렸던 식민지롤 버리게 된 것은 지난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부터였었다.
그러니까 적지 않은 수의 영국사람들이 아직도 자다가는 지난날 제국의 영화의 꿈을 꿈뻑꿈뻑 꾼다고 해서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고 어느 사람 눈엔 그렇게 놀랄만한 게 못될 일이 영국사람들에겐 도대체가 의외로운 일로 비쳐지기도 하긴 하겠다.
요즘 떠들썩해진 남미 포클랜드 도 사태라는 게 그렇다(시정의 영국사람 쳐놓고 지구 저쪽 끝에 그런 이름의 돌 섬이 있었고 그게 아직도 영국식민지였었다는 걸 알고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사람들에게 아르헨티나란 지난1백50년 동안 아주 얌전하게 앉아온 한 개의 계란이었었다. 더우기 영국사람말론「깡통독재자」가 깔고 앉은 계란이고 보면 한낱 보갈 것 없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런 계란이 하루아침 눈을 떠보니까 꿈틀거린다. 그러는가 했더니 그것이 딩굴딩굴 구르기 시작한다. 묘하구나 하고 있으니까 이게 점점 미친것처럼 맹렬하게 구르더니 돌멩이를 받아버린다.
아, 깨졌구나 하고 다시 보니까 웬걸 그 계란이 멀쩡하게 버티고 서있다. 살다보면 정말 별일이 다 있다. 그러나 그건 그래도 약과다. 가만히 보니까 돌멩이에 금이 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