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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구 "무상보육으로 파산" … 정부 "추가 지원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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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무상보육 예산을 놓고 정부와 갈등을 겪고 있는 전국 시·도 교육감들이 6일 대전시교육청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날 시?도교육감협의회는 무상보육을 위한 일부 예산을 편성하기로 결의했다. 왼쪽부터 설동호 대전·김석준 부산·우동기 대구·조희연 서울 교육감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전=프리랜서 김성태 기자

부산시 부산진구 가야1동에는 폭 2m의 좁은 도로가 200m에 걸쳐 있다. 소방차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도로다. 소방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데 드는 돈은 20억원. 하지만 돈이 없어 못하고 있다. 하계열 부산진구청장은 “올해 예산(일반회계 기준) 3500억원 중에 복지비 65%, 인건비 등 30%를 빼고 나면 남는 돈은 5%뿐”이라며 “뭘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 북구청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 약 4700억원의 예산 중 3000억원(64%)을 무상보육 지원이나 기초연금 지급 같은 복지 분야에 쓴다. 익명을 원한 북구청 관계자는 “깨진 도로를 포장할 돈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무상복지 부담에 눌린 시·군·구의 실정이 이렇다. 6일 전국 226명의 시장·군수·구청장이 ‘복지 디폴트(지급 불능)’를 선언한 이유다.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대표회장 조충훈 순천시장·이하 협의회)는 이날 경북 경주시 힐튼호텔에서 개최한 총회에서 ‘경주 선언문’을 발표하고 “기초연금과 무상보육 부담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기초연금과 무상교육 같은 국가 사무의 재정 부담을 지방에 전가해 지방 재정의 파산을 초래하고 있다”며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구조는 역사 이래 최악의 상태에 놓였고, 이제 더 이상 국가를 대신해 부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기초연금과 무상보육이 우리 주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한 뒤 “이를 외면해 ‘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복지 디폴트를 선언했다. 그러면서 “국가 사무인 복지 비용은 전액 국비로 충당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상급식은 “기본적으로 교육청과 광역시·도가 논의할 사안”이라는 이유로 거론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기초연금·무상보육 부담금을 내지 못한다는 것인지 선언문에는 명시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협의회 집행부에 포함된 시장은 “내년 1월까지 정부 반응이 없으면 3월 전에 비상총회를 소집하고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고 전했다. 정부가 무상복지 지원을 늘리지 않을 경우 내년 초 실제 복지 디폴트 상태에 들어갈 것이라는 얘기다.

 협의회에 따르면 2013년부터 무상보육 대상이 0~5세로 전면 확대되면서 시·군·구 부담이 한 해 총 1조4000억원 증가했다. 올해 무상보육 부담액은 3조6000억원에 이른다. 또 올 하반기부터 기초연금 제도가 실시되면서 반년 동안 7000억원을 추가 부담하게 됐다. 내년 부담금은 두 배인 1조4000억원이다. 복지 부담이 늘어난 데다 부동산 경기가 나빠지면서 지방이 거두는 등록세·취득세 수입은 줄어 시·군·구는 이중 압박을 받고 있다.

 시장·군수·구청장들이 복지 디폴트를 선언했지만 정부는 추가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무상보육과 관련해 보건복지부 장호연 재정운용담당관은 “지방 부담을 줄이려고 지난해 무상보육 국고보조율을 15%포인트 올렸다”며 “무상보육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기초연금을 담당하는 복지부 연금정책국장은 “기초연금 지급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해결이 가능한 수준으로 본다”고 했다.

 협의회는 이날 지방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현행 11%인 지방소비세를 20%로 높이고, 담뱃값 인상으로 인해 늘어나는 세수를 시·군·구가 갖도록 할 것 등을 요구했다. 개헌 논의와 관련한 입장도 표명했다. “국가 사무를 지방에 위임할 때는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도록 헌법에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헌법으로 지방선거에서 정당 공천을 배제할 것, 지방정부의 형태와 조직을 지방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헌법에서 보장할 것 등을 요청했다.

 ◆시·도교육감 긴급회의=전국 시·도교육감들은 이날 “내년에 일단 2~3개월분 무상보육(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오후 7시30분부터 10시40분까지 대전시교육청에서 긴급회의를 한 뒤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서다. 지난달 무상보육 예산을 편성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에서 입장이 바뀌었다. 다만 형편상 예산을 잡을 수 없는 시·도는 예외로 하기로 했다. 시·도교육감협의회는 보도자료에서 “어린이집 보육 대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해 이렇게 입장을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회의에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 친전교조 성향의 교육감 9명과 우동기 대구시교육감 등 보수 성향 교육감 4명이 참석했다. 이청연 인천시교육감 등 4명은 불참했다.

경주=김윤호 기자, 천인성·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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