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여인 파동|김이열<작가|감염 우려 있는 부분까지 도려냈으면 정성어린 간호 뒤따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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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열흘 이상을 시커멓게 굵은 활자로 우리를 압박해온 장 여인 스캔들은 이제 신문이나 방송매체에서 차차 사라질 것이다.
억이란 단위의 돈은 정부의 예산안이나 은행의 장부, 기업의 장부에나 기록되는 줄로 알고 있던 우리들에게 이번 사건은 비할데 없는 충격을 주었고 또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철없는 아이가 성인영화를 본 느낌이랄까, 한강에 흘러드는 폐수를 눈으로 확인한 느낌이랄까.
구역질나고 나른해지며 한 며칠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푹 쉬고 싶어진다.
차라리 지하철 공사장이 무너져 시내버스가 매몰되었다는 사고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안에 혹시 네 친구는 없었는지 하고 걱정했다. 그게 우리한테 어울리는 사건이지, 이번 장 여인 스캔들은 아무래도 우리들 것은 아닌 것 같았다.
1억, 10억, 1백억, 1천억, 나중엔 6천억이란 단위의 액수도 보였다.
그와 동시에 사채업자 아무개, 지점장 누구, 은행장, 고위층의 인척, 그리고 또 아무개.
작은 고기에 좀 더 큰 고기, 거기에 더 큰 고기가 물려 나왔다.
유례없이 활발한 보도와 발언에 우리들은 되레 겁을 먹기도 했다.
국의 질의 내용도 시원히 보도되었고(다소 그 답변에 불만이 있긴 해도),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또 발전했다.
이렇게 느끼는 우리들의 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는 미리 알아서 피하는, 미리 알아서 처리하는 극히 비정상적인 눈치의 기준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보내온 일깨움의 메시지였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분명 앓고있는 사회이다.
고질화된 염증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비관적일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골수염 정도의 악성염증이 것 같다.
외과적인 치료밖엔 신통한게 없다.
대개 골수염을 앓고 있는 환부에서 균이 올라오지 않았을만한 안전한 부위까지 절단해야 할 것이라고 의사는 진단한다.
말이 쉽지, 멀쩡한 부위까지 절단한다는 것은 현재 앓고있는 환자에겐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이다.
만약 의사 자신의 다리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렇게 치료를 받겠다고 할까.
보호자나 의사는 남의 일이기 때문에 절단을 쉽게 권할 수 있을거다.
우리는 대폭적인 수술, 될수록 많은 부분을 절단해야 될 것이라고, 병든 사회를 향해 외친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건 주변에 있는 큰 의자의 주인이 바뀌고 관련된 부처의 장관이 바뀌었다.
그런 국부적인 치료는 수없이 받아왔지만, 아픈데가 많은 우리 사회는 좀처럼 쾌유되지 않았다.
쉰밥은 그대로 두고 그릇만 바꾼 셈이 되었는지.
이번엔, 정부는 감염되지 않은 부분까지 절단해내는 용단을 내렸다.
건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그 어떤 진통도 이겨내겠단 의지로 보였다.
이제 우리는 성급하지 말고, 애정 어린 간호로 회복되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새벽길을 쓰는 청소부 아저씨의 빗자루 소리는 오늘 새벽에도 같은 시간에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어김없이 빛을 가져다주는 태양의 약속만큼이나 고마운 것이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바뀐다 해도 그 새벽소리에 변화가 없는 한,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내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다.
땀 밴 손에 받아 쥔 적은 돈이 그 어떤 거액보다도 우리에게 더 값진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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