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중대 제안' 정부 발표] 꿈쩍않던 김정일 "전기 공급"에 솔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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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님, 6자회담 복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늦어도 7월에는 북한이 돌아와야 합니다."(정동영 통일부 장관)

"특사 선생, 지금 복귀를 얘기하면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는 꼴이 돼 안 됩네다."(김정일 위원장)

"7월로 못을 박으세요."(정 장관)

"안 됩네다. 굴복할 수는 없습네다."(김 위원장)

꿈쩍도 않던 김 위원장은 결국 "미국이 우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7월 중에라도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는 말을 했다. 여권 핵심 인사가 전한 6월 17일 김정일-정동영 면담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김 위원장의 이 발언은 20여 일 뒤에 현실화됐다.

면담을 마친 뒤 기자 브리핑에서 정 장관은 김 위원장이 자발적으로 7월 복귀를 시사한 것처럼 발표했다. 그러나 진실은 서너 차례에 걸친 정 장관의 설득을 김 위원장이 억지로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열쇠는 역시 정 장관이 김 위원장에게 전달한 '중대 제안'이었다. 핵 포기의 대가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전기를 보내겠다는 제안에 대해 김 위원장이 귀를 쫑긋하며 경청했다고 한다. 6자회담에 대한 김 위원장의 완고한 입장이 조금씩 누그러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시 대통령 각하라고 부를까요"라는 김 위원장의 언급도 사실은 우리 측의 치밀한 전략회의를 거쳐 유도된 것이다. 시작은 정 장관을 수행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당국자의 아이디어였다. "김 위원장 입에서 '각하'란 말만 나와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분위기 조성에 기여할 것"이라는 제의였다. 실제 회담에서 정 장관은 중대 제안과 'Mr. 김정일'이라는 부시 대통령의 언급을 두세 번 상기시키며 김 위원장의 발언을 유도했다.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의 분수령이 된 6.17 면담의 성과들이 나온 과정이다.) 김 위원장의 유화적인 언급들을 자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반긴 관계국들의 이해를 고려할 때 공개가 어려웠던 내용이다. 정 장관은 이처럼 최근 급류를 타고 있는 북핵 정국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는 12일 또 한 번 뉴스의 중심에 섰다. 그동안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중대 제안 내용을 국민에게 공개한 것이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 직후 NSC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있지만 그가 김 위원장과 면담하기까지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 지옥에서 천당까지=정 장관은 1일로 취임 한 돌을 맞았다. 그 1년은 그에게 지옥과 천당을 모두 맛보게 했다. 정 장관의 한 측근은 "6.17 면담 이후 일정은 훨씬 바빠졌지만 표정이 확실히 밝아졌다"며 "그동안의 마음 고생을 털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0개월간의 지긋지긋한 '식물 장관' 생활 이후 김 위원장 면담 성사와 6자회담 재개라는 '대박'이 터졌다. '정치인 정동영'에서 '장관 정동영'으로 변신하면서 달라진 생활을 정 장관은 이렇게 표현했다.

"원래 아침잠이 많은데 장관이 되면서 두 시간 정도 더 잡니다. 한 시간 일찍 자고, 한 시간 늦게 일어납니다. 아침엔 아들과 우면산 등산도 합니다. 조찬이 잦은 정치인 시절엔 상상도 못했습니다. 폭탄주는 완전히 끊었고, 와인이나 백세주만 먹습니다. 골프는 장관이 된 뒤엔 다섯 번밖에 안 쳤습니다. 정치인 때는 아침에 일어나면 조간신문부터 집어들었는데, 이제 밤새도록 쌓인 팩스를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체중은 2kg 줄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순간요? 북이 핵 보유 선언을 한 2월 10일이 가장 곤혹스러웠습니다. 남북관계가 막혀 있는데 악재가 겹쳤던 것이죠."

절정으로 치닫던 핵 위기는 6자회담 재개로 한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장관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6.17 면담 이후 빨라지고 넓어진 그의 행보에 대해 야당이나 국민 일각에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유력한 대선 주자의 한 사람으로서 핵 문제 해결이나 남북관계 개선 등의 본안보다는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효과에 더 관심이 큰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그에겐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자체보다 6자회담 이후의 국면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더 부담스러울 것 같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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