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에 묻혀 느긋…, 야인 카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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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 남부 선 벨트지역인 조지아주 플레인즈 마을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아늑하고 조용하다. 인구 6백51명. 푸른 숲에 싸인 조그마한 마을 플레인즈는 1년4개월 전까지만 해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마을.「지미·카터」본명-「제임즈·얼·카터」.
도덕정치를 들고 나와 조지아주의 시골정객에서 일약 세계 대통령으로 도약했던 인물. 스 마일링 프레지던트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특유의 미소를 뿌렸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고향 플레인즈로 낙향, 과거 속에 살면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내 뼈를 묻을 곳.』「카터」전대통령은 스스럼없이 고향을 말한다.
이제는 이란인질의 악몽도 사라지고 꽉 짜인 스케줄도 없다. 이것저것 결정을 내리고 결재를 해야 할「골치아픈 일」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카터」의 머릿속에서 멀어져 있다.
그에게 남은 것은 4년 골안 하루도 빠지지 앓고 기록한 일기장. 지금「카터」씨는『신의를 지키며』(Keeping faith)라는 가제의 회고록 집필에 온 정력을 쏟고 있다.
물론 조깅과 자전거 타기는 워싱턴에서와 다름없이 건강을 위해 계속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낙향한 이후 꼭 필요할 때를 재외하고는 누구를 초청해 본 일도 없다.
과거에도 그랬지만(워싱턴에서도 그랬다)그는 거의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 오히려 은둔자적인 생활을 더욱 즐기는 듯하다. 이 점은 정치생활을 하는데 큰 마이너스 요인이 됐었다.
그를 돕기 위해 플레인즈에 내려와 있는 여비서「수전·클라우」는 9개월 동안「카터」 와 얘기를 나눠본 것이 고작 두 번, 오히려 무시당하는 듯 하다.
전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2명의 경호원이 배치되어 있지만「카터」부부가 조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즐길 때 따라 나서는 것이 임무수행의 전부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카터」씨는 전 대통령이지만 워싱턴 경제에서 철저히 잊혀져 그의 동지였던 민주당 국회의원들조차 그를 찾아보는 사람이 없다.
민주당에서 다음번 대통령 후보를 꿈꾸는 인사 중「카터」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민주당 전국위원회 위원장인「처크·머너트」와 같은 지도자들은「카터」가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카터」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민주당 쪽 뿐이 아니다. 그의 후계자로 백악관을 차지한「레이건」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수개월 동안「카터」는 정부안의 고위관리·정치인·언론계 등 각계 주요인사 수백명에게 제공되는 뉴스브리핑 자료를 하나도 받지 못했다. 전 대통령으로 당연히 제공받을 권리가 있는 것들이다.
「카터」는 참다못해 그의 백악관 대변인이었던「조디·파월」을 시켜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백악관에 압력을 넣은 후에야 뉴스 브리핑자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자의건 타의건 철저히 야인이 된「카터」지만 이런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낙향한 후 목공실을 하나 내었는데 손수 톱질을 하고 대패질을 한다.
식사때나 코피타임때 이용되는 거실에 있는 큰 호도나무 탁자는 그가 직접 만든 것이다. 호도나무는 이웃에 책을 주고 바꾼 것.
「카터」는 가구를 만들면 꼭 자기이름을 새겨 넣는다. 수십년 수백년이 지나면 값이 엄청나게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카터」는 새벽5시에 기상, 밤 10시30분 취침, 8시간 노동의 규칙적인 하루생활을 그야말로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지금 그의 생활의 대부분은 회고록 집필이다. 미래의 계획은 회고록 집필이 끝나면 아틀랜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과의 제휴로 도서관과 공공연구 기관을 하나 설립하는 것이다. 금년 가을에는 에모리 대학에 나가 강의를 할 예정인데 인권·군비 축소, 그리고 환경문제가 주요 주제가 될 것이다.
부인「로절린·카터」는 낙향한 후 6개월간은 텔리비전 뉴스를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마음을 가라앉혀 지난 옛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다.
「로절린」여사는「레이건」대통령이 감세 정책을 추진해 그녀가 백악관시절 정력을 기울여 추진했던 연방정부의 정신건강 정책이 결실을 맺지 못할까를 아쉬워하고 있다.
회고록의 4분의1은 그가 재임 중 평화를 이룩하려고 전력투구했던 중동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카터」전대통령은 지난4월5얼 시나이반도가 이집트에 반환됐을 때「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에게 축하전화를 걸 정도로 중동문제에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쨌거나 지난해 1월 워싱턴을 떠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달리「카터」전대롱령은 자연으로 돌아가 은둔자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플레인즈는 나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고향에 정착한 전대통령은 그의 생활지표를 그렇게 표현한다. < 이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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