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가 큰일 낼 것만 같았다"|구속까지 하게 된 파란만장의 이규광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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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베일을 벗은「보이지 않는 손」-.
2천억 원을 집어삼킨 장영자 여인의 형부로 어음사기 극의 비호세력으로 떠오른 이규광씨(57).
이규동씨(대한노인 회 회장)의 친동생이기도 한 그의 주변에는 권력의 언저리에 날아드는 불나비들이 항상 서성거렸다.
이씨는 3형제 중 막내로 두 형도 군 출신.
본적은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수리1840.
해방 후 잠시 경찰에 투신했다가 47년 육사 3기로 임관했다.
제주도폭동사건 때 진압부대요원으로 출동한바 있으며 이때 공적을 인정받아 헌병병과가 신설되면서 제주도지역 헌병 대장으로 임명돼 줄곧 헌법으로 있었다.
초급장교시절 과묵하고 강직한데다 맺고 끊는 면이 엄격해 헌병직책을 모범적으로 수행했다는 것. 이 때문에 진급도 비교적 빨라 헌법학교장·헌병사령부 부사령관·육군헌병 감·제2훈련소강·부군단장 등을 지냈다. 5·16후 61년 7월 육군준장으로 예편한 이씨는 63년 3윌「박임항 장군 반혁명음모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국토건설 단 보좌관직을 맡고 있다가 박임항·정진씨(예비역 대령)등과 주모자로 몰려 1심에서 사형을 구형 받기도 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2년만에 풀려났다.
교도소 안에서는 교도소 측의 특별배려로 반혁명 동지들과 식사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옥바라지는 주로 둘째형인 이규성씨가 맡아 했다.
이씨는 공직근무기간 미달 등의 이유로 연금대상에서 제외돼 준장으로 예편됐으면서도 연금혜택을 받지 못해 생활이 더욱 어려웠다는 것.
이씨는 10·26후 80년 5월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되기까지 일정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불우한 시절에 처제 장 여인이 이씨의 가계를 도와 형부와 처제의 통상적인 인척관계라 기 보다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주변에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그의 처지는 그가 68년 10월부터 80년 10월까지 12년 동안 1년에 한번 꼴로 꼬박 12번씩이나 이사하는 등 10·26 전까지만 해도 집 한 간 없이 지내 온 것으로 알 수 있다.
이씨는 75년 9월 부인 장성희씨(당시 43세)와 함께 국유지불하와 관련, 동부지청에 변호사법 위반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이씨 부부는 같은 해 9월 입건돼 이씨는 기소유예처분, 부인 장씨는 정식 기소돼 징역 1년 6월·추징금 3천3백 만원을 선고받았다.
이때 추징금을 처제인 장·김수철 부부가 물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부인(장성희·50·장영자 언니)과는 재혼으로 자녀는 모두 4남.
먼저 부인과의 사이에 2남이 있으나 미국 등지로 이민 갔고 현재 서울에는 장씨와의 사이의 소생인 K대 1년 생 아들(18)이 있다.
이씨는 부인 장씨가 살림을 꾸려 왔기 때문에「내 주장」에 눌려 살았다는 것이 주위사람들의 얘기.
실제로 장씨가 지난 4월17일부터 5월8일까지 전북 남원의 암자(S수도원)에 단식 수도하러 머무를 때 서울에서 저명인사(?)의 부인들이 이 암자에 몰려들었으며 지난 2월 아들이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재계거물급인사들이 단체로 출국했다는 설도 있다.
10년 이상 자기 집이 없던 이씨는 지난해 11월27일 서울 방배동801의10 대지 1백40평·건평 1백 평 짜리 호화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지역은 이번에 재산세고액납부 3위를 기록한 S주택C회장 집을 비롯해 D그룹 K회장 집 등 이 있는 고급주택가로 이씨의 집 역시 시가 3억 원을 호가하는 호화주택.
이씨는 이 집을 81년 12월1일자로 김금옥씨로부터 사들여 그 해 12월27일자로 담보로 잡힌 듯 등기부상에는 D그룹회장 이종각씨(서울 동숭동199의8) 앞으로 가등기 돼 있다.
이씨는 82년 1기분 건물분 재산세로 45만4천9백42원을 납부한 것으로 돼 있다.
이씨는 이 호화주택에 입주해 살기 전에 서울 한남동726의111 힐 사이드 빌리지 B동3호 60평 짜리 아파트에 전세 2천만원에 살았으며 이번 사건이 터지자 방배동 주택에서 다시 아파트로 옮겼다.
이 아파트는 2층으로 아래층은 거실·부엌·화장실이고, 위층은 침실 4개·목욕탕 2개 등으로 꾸며져 있다.
월 관리비는 평균 5백 달러(35만원)선.
고려개발에 따르면 이씨는 80년 9월『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일반인이 오기 힘든 조용한 곳에 있고 싶으니 힐 사이드 빌리지를 빌려 달라』고 부탁해 전세입주를 했다는 것.
이씨는 이번 사건이 터진 후 사표를 내기 위해 동자부장관과 만난 자리에서『처제가 이 사람 저 사람 붙어 놀아나 골치를 많이 썩혔다』며 『계엄이 내려진 80년에 잡아넣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는 것.
이씨는 자신이 81년 사정기관에 이미 처제의 비위사실을 알렸으며 재빨리 손을 쓰지 못한 것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됐다고 탄식했다는 뒷소문이다.
80년 5월12일 제6대 광업진흥공사 사장에 취임한 이씨는 13일 사임함으로써 꼭 2년1일만에 그만둔 셈.
광업진흥공사 자체가 정책결정기관이 아니고 집행기관 성격이므로 사장 그 자체도 지금까지 골치 아픈 문제로 머리를 썩히거나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지 않고 그저 적당히 지내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나 이씨는 달랐다는 평.
『배경 있는 거물 사장』또는『밀어내기 식 업무스타일』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광업진흥공사가 상당히 활기를 띠었다는 것.
이씨 자체는 5·16후 상당한 공백기간을 거쳐 공직을 맡았기 때문에 군 스타일은 가셨으나 밀의 군 출신 참모들이 군 특유의 방식으로 업무처리를 해 왔기 때문에 조직이 상당히 활성화되고 무언가 일을 해보겠다는 분위기였다.
이씨는 재임당시 지난 2월 삼척탄전지대에서 매장량 6천2백만t의 최대 양질 무연탄광 발견 등 업적도 많아 직원들은 상당히 호평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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