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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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요즘 신문엔 연일 뭇 사람들의 얼굴이 등장한다. 자랑스럽고 흐뭇한 얼굴들은 아니다. 심통과 초조와 우 울의 극치들이다. 이런 얼굴들이 신문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시정 인들의 마음도 편하지 않다. 편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역시 침울하다.
문제의 인물들 중에는 뉴스 카메라의 초점을 피하려고 별난 제스처들을 다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측은한 동정도 간다.
그러나 저처럼 수치와 명예를 아는 사람들이 왜 그런 신세가 되었나 하는 탄식도 절로 나온다.
아마 서양사람들이 똑같은 경우를 당하면 어떤 제스처를 보여줄까. 필경 우리나라 피의자들처럼 유난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동양인은 역시 도덕의 척도를 부끄러움이나 체면에서 찾는다. 서양인은 다르다. 정의감을 보다 앞세운다. 척도가 다른 만큼 표정도 다를 수밖에 없다.
법정의 모습에서도 그런 대조를 볼 수 있다. 서양사람들은 비록 살인강도나 파렴치범일지라도 법정에 서면 주먹을 쥐고 열변을 토한다. 아니 피의자는 고개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동안 변호사가 열변 한다.
동양인, 그 중에도 한국인은 그렇지 않다. 나중엔 무죄로 풀려날 값이라도 법정에선 고개를 떨구고, 카메라의 세례를 애써 피하려 한다. 어느 편이 옳고, 그르고 는 시비할 수 없다. 그러나 부끄러움에 그렇게 민감한 사람들일수록 심장은 원숭이의 것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 두개의 얼굴에서 오히려 역겨움이 돋보인다.
남자의 얼굴은 자연의 작품이고, 여자의 얼굴은 예술의 작품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어느 쪽이든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작품」을 어떻게 간수하느냐는 각자의 자기 관리에 달렸다.「에이브러햄·링컨」은 일찍이 대중 연설을 하며『40이 지난 인간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 다』고 했다. 그는 결코 미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추남도 아니었다.
심성이 고귀하면 얼굴에도 그런 빚이 나타나게 마련이다.「W·휘트먼」같은 시인(미국)은 사람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본다고 까지 했다.
글쎄, 요즘 같은 삭막하고 험난한 세상에 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우리의 얼굴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의 목차 같아 잔 시름, 큰 시름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게 마련이다.
우리 속담에도 사람의 얼굴은 열 번 변한다는 말이 있다.
결국 자기 얼굴은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얼굴의 책임도 지지 못할 주제면 뉴스 카메라를 피하는 제스처는 더 피에로처럼 보일 뿐이다. 덤벙한 세상에 살며 얼굴 하나 제대로 지키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요즘의 신문지상은 소리 없이 교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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