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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4)제77화 사각의 혈전 60년-김기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40년대의 복싱>
현해남에 뒤이어 38년 이후 종전까지 한인 복서들이 동경과 대판을 중심으로 일본의 링계를 휩쓸다시피 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40년대에 들어 전쟁에 휩쓸림으로써 북싱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로부터 멀어진 영향이 있기는 했으나 이즈음 박용신 김강용 해동맹 중일출부 박공재 김진용 여재덕 김수일 좌용진강원근 고봉아 등이 프로 복싱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희대의 KO왕 정복수가 무적의 철권으로 군림했다.
이때 많은 선수들이 일본식 링네임을 사용했는데 정복수는 복전수랑, 강원근은 결성민부,강용진은 좌우전기광, 고봉아는 고봉호행, 김수일은 김전수일 여재덕은 덕영진이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프로복싱이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으며 동양 권투회를 만든 황을수를 중심으로 그나마 꾸준히 선수를 육성, 일본·마닐라 등으로 원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배출된 유명선수로는 김진용 김강용 백연길 양정모 한재수 등이 있다.
40년을 전후하여 종전까지의 일본 링계를 훑어보면-.
40년12월20일 대판에서 가장 먼저 권투 흥행의 금지령이 내려쳤다. 전쟁으로 40세 이하의 남자들이 모두 전장, 혹은 군수공장으로 징용 당하는 비상시국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프로 복싱계가 위축일로를 걸은 것은 물론이다. 야구가 적성 스포츠라 하여 전면 금지된데 이어 프로 복싱도「준적성」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 41년에는 호전적인 군국주의 일본의 군부 일각에서 복싱의 라운드 제도를 폐지하라는 주장을 펴 화제가 되었다. 그들은 『전쟁에 라운드는 없다』면서 복싱에서도 승부가 결판날 때까지 쉬지 않고 싸우라고 기상천의의 간섭을 해온 것이다. 이 전쟁광들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귀축 미영」의 잔재를 일소한다면서 영어 용어를 바꾸는 작업은 실현을 보았다.
그래서 그로기는「혼미상태」공은「시종」, 카운트는「번호」, 다운은「피도」, 스트레이트는「직타」, 혹은「조타」, 어퍼커트는「돌상근」등으로 모조리 고쳐 사용했다.
42년3월 필리핀의「베비·코스테로」라는 선수가 일본에 원정 왔다. 한인 선수인 결성민부(강원근)와 첫 대전했다. 그런데 경기 수일 전에 일본은 미영과 전쟁상태에 돌입, 미국의 엄호를 받는 필리핀도 적성국이 되고 말았다. 주최 측(제권) 은 관중들이 적성국 선수를 죽여버리라고 난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막상 대회를 여니 관중은 조용히 경기만 구경할 뿐이었다. 이튿날 일인들과 매스컴은『대 국민의 면모를 보였다』고 자화자찬했다.
복싱을 경원시하면서도 현실적인 필요에는 활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일인들이었다.「국방 헌금 시합」이라 하여 인기선수들을 총동원, 전비의 모금운동을 벌였다.
첫 대회가 42년5월3일 열렸으며 여기에 당시 링계를 주름잡던 한인 선수들이 주로 동원돼 전비 마련의 도구로 악용되었다.
일인 선수로는 굴구항남 세기차 대진정일 등 스타를 망라했고 한인으로선 김수일 충일출부 김강용 여재덕이 나섰다.
꼭 1년 후 2차 국방헌금 시합이 열렸다. 이 때에는 고봉호행(고봉아) 결성민부(강원근) 김전수일(김수일) 좌우전기광(좌용진) 복전수낭(정복수)등이 대 일본 권투협회의 애국 사업에일조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중 6라운드 경기에 출전했던 신인 고봉아는 다른 2명의 일본선수와 함께 파이트머니로 현찰 대신 「대동아 전쟁의 국채」를 받았다.
일본 사회는 영어인「챔피언」이란 말도 기피했다. 42년7월의 일.
그래서 새로운 대회가 만들어 졌는데 과거의 체급별 챔피언 결정전(타이틀 매치)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요미우리(독매) 신문사가 후원한「독매 감투기 쟁탈전」이었다.
이 감투기 쟁탈전의 기 색깔이 체급에 따라 구분돼 페더급은 흰색, 플라이급은 녹색, 밴텀급은 홍색, 라이트급은 청색, 웰터급은 보라색이었다.
첫 감투기 쟁탈전은 김강용과 피스튼 굴구행남의 한일 대결. 페더급이므로 백색 감투기쟁탈 전이었다.
사우드포이며 냉정한 테크니션인 김강용이 예상을 깨고 다채로운 좌우 콤비블로로 강타의 굴구를 시종 맹격, 10회의 판정승을 거두었다.
두달 후에는 좌우전기광(좌용진)이 굴구기치를 꺾고 홍색 감투기를 획득했다. 김강용은 이듬해 2월 대전 기피로 백색기롤 박탈당했다가 1년 후(44년2월)탈환했으며 홍색기 쟁탈전은 강원근이 좌용진 해동맹을 연파해 43, 44년 연속 패권을 누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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