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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견질 어음과 가등기의 함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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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사채시장은 비정하다. 그러나 때로는 사채업자들의 교묘한 함정에 빠져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찮다.
이번 장영자 여인 사건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가 어깨서 뿌리가 깊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내노라는 대기업들이 한 여인의 손바닥에 놀아났느냐 하는 점이다.
파동에 휘말린 업체들-일신제강·공영토건·라이프주택·삼익주택·해태·태양금속-어느 하나 만만한 기업이 없으며 특히 이중 2개 업체는 우리 나라 기업사에도 기록될 만큼 역사를 가진 회사들이다.
그 기업에는 자금담당 이사, 부장 등 사채를 늘 취급하는 전문가들이 많을텐데도 어째서 기업은 실제 빌어 쓴 돈의 몇배에 해당하는 견질 어음(담보조의 어음)을 내 주었으며, 심지어는 돈도 받지 않고 l백억원에 가까운 어음부터 주었을까?
설사 장 여인이 견질로만 받아놓고 들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했다지만, 그 어음이 은행창구에 제시되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이러한 의문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에 휘말린 어느 기업주의 속사정을 들어보자.
장씨 부부의 사채 융통제의를 받은 이 기업주는 마침 돈이 아쉬운 때라 믿을만한(?) 경로를 통해 이들 부부의 신원조회와 신용조사를 의뢰했다.
이들의 화려한 경력은 물론 이규광씨의 인척이라는 배경과 함께 수백억원의 돈을 굴리고있는 사람이라는『믿을 수 있는 정보』가 전달됐다.
이 기업주는 장씨 부부가 자금난에 쪼들리는『우리 회사의 속사정도 잘 꿰뚫고 있다』는 것 등을 종합, 돈을 쓰기로 했다.
50억원으로 출발한 거래는 조건도 좋았고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약속대로 착착 결제됐다.
장씨 부부를 믿게된 이 기업주는 조건이 좋은(연리20%에 2년 거치 3년 분할로 당시 은행보다 금리나 기간 등에서 더 유리했다)사채를 더 많이 쓰기로 했다.
역시 몇 개월 동안은 약속이 잘 지켜졌다.
그러나 얼마 후 이들 부부는 견질 어음을 요구했다.
이들 부부는『나중에라도 자금 출처를 조사 당하면 곤란하니, 당신들의 견질 어음을 은행에 담보로 넣고 은행에서 돈을 꺼내야 내 돈(사채)의 출처를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냐?』 고 했다.
이 기업은 어떤 의미에서는 타당성이 있기에 그러면 견질 어음에 해당하는 만큼의 상대적 댓가를 요구했다.
이들 부부는 견질 어음에 해당하는 만큼의『주식 보관증』을 써 추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견질 어음을 받은 이후 갖가지 이유를 붙여 더 많은 견질 어음을 요구했고, 당초 은행에 담보로 잡히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사채시장에 내다 팔았다.
뒤늦게 이 기업이 견질 어음과 주식 보관증을 교환할 것을 제의했으나 장씨 부부는『괴롭히면 받아놓은 어음을 일시에 몽땅 돌려 부도를 내겠다』고 윽박질렀다. 비록 적자에 허덕였지만 사업에 대한 집념과 검소한 사생활로 재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기업인이었지만 이제 그는「한낱 기업을 망친 부실기업인」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그가 『기업이 돈을 벌 때는 기업 이윤의 사회환수라고 외치던 당국과 여론이었는데 이제 기업이 망하려는 판에 어찌 기업인의 탓으로만 돌려야하느냐』고 호소하지만 대답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77년에 도산한 식품업체인 S산업의 도산도 비정한 사채업자들의 생리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식품업계의 정상을 겨루던 S산업의 창업주 김씨는 건강도 악화되고 자금도 다소 달려 76년10월 S산업의 돈줄을 담당했던 C씨를 대표이사로 영입, 경영권을 맡겼다.
C씨는 경영권을 말자 창업주인 김씨 계열을 퇴임시키면서 김씨와의 불화를 빚었다.
김씨가 경영권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가 77년6월 승소판정을 받았으나 C씨는 사채시장에서 끌어오는 돈줄을 끊었다.
김씨는 결국 77년10월, 경영권을 다시 돌려받은지 4개월만에 사채공세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채업자들이 마음만 먹고 연합전선을 전개하면 기업은 순식간에 앙상한 잔해만 남는다.
과거의 천우사·고려제지·천도제과 등이 그 예다.
기업들은 사채를 안쓸 수 없지만 항상 화약을 지고있는 셈이다.
그동안 소위 건실한 기업(?)이 갑자기 흔들거리거나 부실기업 파동이 날 때마다 그 밑바닥엔 사채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서민들과 일부 중소기업을 올리는 것은 가등기의 함정이다.
부동산을 담보로 잡고 고리 대금을 하는 사채업자들이 즐겨 이용하는 것이 바로 가등기.
서울 종로 뒷골목, 동대문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이들은 신문에『급전대출, 2번 저당도 가』등의 광고를 내고 영업을 하고 있다.
급전을 구해야하는 서민들이 이들 고리대금 브로커들의 주 대상이다.
이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이 부동산 가등기.
돈을 꾸어주면서 서민들의 부동산을 전주명의로 가등기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약정된 기일 안에 돈을 갚지 않으면 가등기권자 앞으로 명의를 이전해도 좋다는 이른바 화해 조서를 꾸미고 공증까지 받는다.
대출 기간은 3개월이 관례. 이때 일부 악덕 브로커들은 원하는 기간만큼 돈을 연장해줄 수 있다는 얘기를 하지만 그동안 이 말을 믿다가 재산을 날린 사례가 많다.
3개월 만기가 돼 기일 연장을 하려고 브로커를 찾아가면『전주가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에 연장이 어렵다』고 튼다.
만약 돈을 빈 서민이 다행히 돈이 일찍 마련돼 사채를 미리 갚으려해도「약정기간」을 이유로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일부 악독한 브로커들은 약정기간이 되면 아예 자리를 피하거나 사무실을 옮기기도 한다.
돈을 빈 서민이 돈을 갚으려고 찾아다녀도 브로커나 전주들은 이미 자리를 감추었고 본의 아니게 약정기한을 어기게되고 가등기했던 부동산도 날려버리게 된다.
한때는 이같이 계획적인 사기방법으로 담보로 잡았던 부동산을 상습적으로 사취해온 일당이 구속된 예도 있다.
이럴 때는 갚을 돈을 법원에 공탁하고 가등기 말소절차를 밟으면 되지만 착하기만 한 서민들은 이를 모르고 당하기가 십상이다. <박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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