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수법이「세태」를 반영|박영복-율산-장 여인 사건의 비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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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잊을 만 하면 터지는 금융파동은 그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다. 경제규모가 커지는 이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74의 박영복씨 사건, 79년의 신선호씨(율산) 사건에 이어 이번 터진 장영자 여인 사채파동은 가히 메거톤 급이다.
과거 금융파동도 사건관련 은행장이 구속되고 대규모 대 손이 나는 등 충격이 컸으나 이번은 그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커질 전망이다.
74년의 박영복씨 사건(금록 통상 대표)은 당시 중소기업은행 등 7개 은행에서 71억 원을 대출 받았고 이중 부정대출 액은 30억 원, 회수불능 액은 5억 원이었다.
박씨는 대출 액 71억 원 중 부동산등기부등본과 수출신용장위조 등 사기수법으로 30억 원을 부정 대출 받았다.
그 때 경제규모로는 이 같은 액수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과 관련, 중소기업은행 정우창 행장이 구속되고 심병유 서울은행장이 사임했었다.
박씨 사건은 부정대출의 액수가 엄청난 데다가 사기수법도 대담하고 뇌물과 향연이 뒤엉킨 금융 가의 부조리를 노출시켰다. 권력층도 개입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금융사상 최대의 사기사건」으로 기록되었다.
74년4월18일 당시 은행감독원장 조진희씨가 박씨와 관련된 총 대출 액이 74억 원이라고 발설하면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 이 사건은 국회에까지 비화, 국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조사에 나섰고 74년 말까지 금융 가를 비롯, 사회전반에 걸쳐 큰 파문을 던졌다.
당시 김치열 검찰총장은 중앙정보 부 간부 및 전 국회의원을 포함한 39명의 배후세력과 관련자를 조사했다고 밝혔었다.
박씨는 8년 만인 올 2월 형 집행정지 중 3억7천만원을 또 사기수법으로 부정 대출 받아 구속됐다.
79년 4월에 터진 율산 사건은 이 그룹대표 신선호씨가 회사공금 1백5억 원을 횡령하고 외화도피혐의 등으로 구속됨으로써 발단됐다.
그때 신씨의 나이는 34세. 율 산은 75년 6월에 자본금 1백만 원으로 출발, 불과 4년만에 율산 실업을 모 기업으로 14개 계열기업과 37개의 해외지사 망을 갖는 등 신흥재벌로서 부상하고 있었다.
율산 그룹 14개 사의 총 대출 액(78년 말 현재)은 1천5백23억 원.
율산 사건으로 주거래은행인 서울신탁은행장 홍윤섭씨가 업무상배임혐의로 구속되고 홍씨를 포함한 4개 은행장이 사임하는 등 돌풍을 몰고 왔다.
후유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0개 은행장의 인사이동이 뒤따랐다. 이때부터 은행장이 제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은행장 수난시대가 열렸다.
금융부조리 때문에 4개 은행장이 한꺼번에 물러난 것은 금융사상 처음이어서 금융계가 받은 상처는 심각했다.
율산 사건은 79년 2월초 신선호 율산 사장이 청와대비서실 이름을 판 괴한의 전화를 받고 나가 납치 미수 극이 벌어져 발단됐다.
피해자가 된 청와대비서실은 신사장의 납치미수 극 직후 율 산의 경영내막을 알아봤고 너무 문제가 많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신씨는 『청와대비서실장이 보자』는 연락을 받고 기획원 청사 앞에 나갔다가 납치직전에 위기를 벗어났었다. 실은 청와대 비서실을 판 사기 극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은 신씨가 틀림없이 약점이 있거나 율산이 문제를 안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판단, 율산의 내막을 조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건으로 율산은 결국 공중 분해되고 말았으며 국내뿐 아니라 특히 해외에 미치는 악영향은 계산이 불가능하리 만큼 컸다.
장 여인 부부사건을 박영복 사건·율산 사건 등과 비교해 볼 때 그 규모와 지능적인 수법에서 월등히 앞선다.
담보조의 견질 어음만도 2천48억 원(어음 총 발행 액은 2천6백24억 원)으로 14개 계열기업 군을 거느렸던 율산의 당시 총 대출 액(1천5백50억 원)보다 그 규모가 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박영복씨 사건의 71억 원과는 비교가 안 된다.
물론 그동안 우리경제가 성장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스케일이 크고 또 수법이 지능적이다.
박영복 사건이나 율산 파동은 기업을 하다가 잘 안 되어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번은 순전히 돈놀이만 했다는 점에서 더 악질적이다.
또 율산 사건은 은행의 융자를 이용한 기업과 은행의 관계였다 면, 장 여인 부부사건은 은행을 하수인으로 삼아 또 하나의 사설금융업을 해 온 지하은행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단순한 경제적 사건이었다 기보다는 당시의 세태를 반영한 사회병리 적 사건이라는 점이 강조돼야겠다. <박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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