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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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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자전거 경영'이라는 말이 있다. 연방 페달을 밟아 달리는 자전거처럼 남의 돈을 계속 빌려 이런 저런 투자를 하며 기업을 굴려간다는 뜻이다. 빌리고, 벌고, 갚고, 또 빌리고 벌어 갚고…. 이런 차입 경영의 사이클이 척척 이어지면 내실과는 상관없이 기업의 덩치는 쑥쑥 커진다. 그러다 어느 한 단계에서 막히기라도 하면 자전거는 쓰러지고 만다. 세간에선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경영스타일을 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전거 경영'을 하던 기업인이 어디 그뿐이었는가. 외환위기 전후에 뜨거운 맛을 본 기업인들이 대개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정치인도 이를 따라하는 듯하다. 갖가지 비정치적 이슈를 '차입'해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금 핫이슈가 된 서울대의 통합교과형 논술고사 도입안이 대표적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지도 않은 단계에서 대통령이 한 말씀 하자 단박에 주요 정치 이슈로 떠올랐다. 평소 교육문제에 진지한 성찰을 한 것 같지도 않던 일부 정치인은 서울대를 공교육 붕괴의 원흉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에 코드가 맞는 교육단체도 거들고 나섰다. 대한민국의 수험생들이 기를 쓰고 들어가려 하는 대학이 하루아침에 '공공의 적'으로 몰렸다.

이를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가 확 갈린다. 당사자 입장에선 아군과 적군이다. 편 가르기가 단순명료하다. 여기에 강남, 부자, 기득권층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얹혀졌다. 뿌리깊은 학벌주의의 원산지도 서울대로 지목됐다. 감정을 자극해 갈등을 증폭시킬 만한 가연성 재료들이 차곡차곡 쌓인 셈이다.

여기에 성냥불을 그어댄 것이다. 그 결과 서울대의 입시제도에 대한 논란은 비강남과 강남, 빈자와 부자, 진보와 보수, 개혁과 반개혁의 대결구도로 자리잡게 됐다. '교육적 관점에서 어떻게 하자'는 차분한 대안을 듣고 싶지만 핏대 선 정치논리에 일찌감치 밀려났다.

정부는 김진표 교육부총리를 임명할 때 경제에 밝다는 점을 많이 고려했다고 알려져 있다. 애초부터 교육정책에 경제논리를 접목할 의도였다면 서울대의 입시 문제도 그렇게 풀어가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아니 그럴 생각도 없이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정치 이슈로 변질시켰다. 이제 서울대가 통합교과형 논술고사로 불리는 본고사를 도입하느냐, 마느냐는 교육정책의 차원을 떠나 고도의 통치영역으로 편입된 느낌이다.

물론 지금처럼 교육문제가 꼬여 있는 상황에선 대통령이 교육을 직접 챙기는 게 맞는 일이다. 교육은 너무나 중요해 교육인적자원부에만 맡겨둘 수 없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머리에서 나와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미래의 인재 양성에 대한 큰 비전이 아닐까. 21세기 한국을 먹여살릴 인재를 어떻게 키워낼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많은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급 교육정책이다.

대통령이 이 기대에 부응하든, 개별 대학의 입시문제에 매달리든 정권의 소신파 지지자들은 변함없는 지지를 보낼 것이다. 집권층 입장에선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지지층의 결속력을 점검하는 '동원훈련'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나는 마찰열은 집권세력의 전의를 강화시켜 주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식의 대응은 서울대의 입시문제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찬반이 엇갈리는 이슈를 자꾸 정치화하고 싶은 유혹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 '자전거 정치'의 페달을 계속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이슈를 정치로 차입해와 편을 가르고, 상대를 제압해 국면을 돌파한다. 그 사이클을 이어감으로써 불안한 지지율 속에서도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은 아닌지.

여기서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상대를 밟고 지나가는 식의 '자전거 정치'는 결코 '윈윈 게임'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잘 굴러가도 어느 한쪽엔 패배자가 나온다. 상처도 깊이 남는다. 기우뚱하기라도 하면 국민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마치 '자전거 경영'이 그렇듯.

남윤호 미디어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