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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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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공주 상만큼 테러를 많이 당한 것도 없다. 1913년 세워진 이래 두 번 목이 잘리고 한 번 팔이 부러졌으며 여섯 번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90세 되던 2003년에는 허리에 설치된 폭약이 터져 몸통이 날아가 버렸다. 시 당국이 가까스로 복원해 놓았지만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인어공주는 골병이 들대로 들었다.

테러를 당하는 이유를 인어공주가 알 턱이 없다. 동화 주인공을 겁줘서 뭐하겠는가. 테러란 단어는 '겁주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terrere'에서 비롯됐다. 흔히 쓰는 테러는 테러리즘의 혼용이다. 테러리즘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98년 프랑스 한림원이 발간한 사전에서다. 프랑스 혁명 말기 왕권복귀를 꾀하는 왕당파에 대한 자코뱅당의 '공포정치'를 의미했다.

그러나 테러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앞선다. 고대 스키타이인들은 저항하는 부족들의 피를 마시고 뼈를 갈아 바름으로써 공포를 조장했다. 서기 1세기 팔레스타인인들은 시카리(Sicarri)라는 테러단체를 결성해 로마에 협력하는 유대인들을 공격했다. 11~13세기 페르시아의 이슬람 과격단체들은 암살자를 고용, 기독교 지도자를 살해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도 혁명 수행을 위한 적색 테러와 반동파의 백색 테러가 난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테러는 특수 이해관계에 있는 상대에 한정된 것이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가 등장한 것은 60년대 이후다.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테러리스트들이 항공기 납치, 공공건물에 대한 자살폭탄 테러 등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테러리즘의 의미가 확대됐다. 브리태니커 사전 최신판은 테러리즘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나 대중 또는 개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폭력을 사용하는 조직적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당연히 테러 대상도 무한정 확장됐다. 인어공주와 마찬가지로 9.11 테러나 런던 연쇄 테러의 희생자들도 아무런 이유 없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목적이 무엇이든 테러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되는 이유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인어공주나 또 다른 도시의 시민들이 새로운 테러의 희생자가 될 것이 거의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