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기업 정서' 위험 수위] (5) 원인과 해결방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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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재계는 국민의 반기업.반시장 정서가 심해졌다고 판단, 대응책을 조속히 마련키로 했다. 전경련은 반기업 정서의 심각성을 회장단 회의의 주요 의제로 상정해 재계 차원의 공동 대책 방안을 중점 논의키로 했다.

이와 관련,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저변의 여론이 바뀌지 않는 한 정부 정책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도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크게 변했는데도 이를 제대로 알리지 못해 국민이 과거의 반기업 정서를 그대로 갖고 있다"면서 "대(對)국민 홍보와 경제 교육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반기업 정서, 왜 심각해졌나=중앙일보 설문조사 결과에서 드러난 한국인들의 심각한 반기업 정서는 상당부분 '평등주의'의식에 기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흔히 '부자가 세금을 안낸다' '부정한 방법으로 대기업이 됐다' '분식회계.변칙상속.정경 유착 때문에 재벌이 싫다'고 얘기된다.

이런 면에선 중국의 기업.부자들이 한국보다 못한데도 설문조사 결과는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인 한국보다 훨씬 긍정적인 기업.시장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양국 국민의 기질 차이가 주된 이유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국 상하이에서 유통업을 하는 박선우(41)씨는 "중국인은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부자가 되려 노력하고, 또 이를 당연시한다"고 말했다.

중국 사회과학원 우쑤촨 박사도 "중국인은 돈을 벌기 위해선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실용주의 전통이 강하다"고 했다. 광둥성의 자오 류성 변호사는 "중국인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실사구시형"이라고 말한다.

반면 한국은 같은 유교문화권 국가이면서도 전통적으로 사농공상(士農工商)가치관을 갖는등 중국과 문화.사상적으로 다르다(자유기업원 김정호 부원장)는 것이다.

평등주의는 '큰 것'에 대한 비판과 '약자'에 대한 배려로 나타난다. 변칙상속.투명경영 등은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나은데도 한국인 중소기업이 더 잘 돼 있다고 생각한다. 중소기업.영세상인을 '약자'로 생각해 무조건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과 관련이 있다.

현명관 부회장은 경제 교육의 부실.왜곡을 지적한다. "해방 이후 시장경제와 기업의 역할 등에 대한 교육은 사실상 없었다"면서 "그러니 국민이 기업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며, 이를 통해 국민 복지가 증진되는데도 국민은 기업을 국가 발전의 도구로 잘못 인식하며, 이윤 극대화는 복지 증진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얘기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박사는 정부의 잘못을 지적한다. "정부가 여론을 근거로 대기업은 개혁 대상, 중소기업은 지원 대상이라며 시장원리에 어긋난 정책을 펴오면서 국민정서가 더 악화됐다"고 비판했다.

한국개발연구원 임영재 박사는 "업종 전문화.빅딜(대규모 사업교환).중소기업 고유 업종 지정 등 잘못된 국민 정서에 입각한 정책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산업연구원 김용열 박사는 기업이 자업자득한 부분도 많다면서 "기업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기업시민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소홀히 해왔다"고 말했다.

진보성향 학자들의 모임인 대안연대회의 정승일 박사는 "분식회계 금지와 투명경영 등은 기업의 최소한의 의무"라면서 "이를 소홀히 한 기업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반기업 정서가 심각하면 국민 전체가 손실이다. 정부는 여론에 따라 나라 경제에 큰 해악을 미칠 정책을 펴고, 기업은 더욱 위축된다.

여론이 정책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감정적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가령 설문조사에서 '집중투표제.출자총액제한제 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더니 '내용을 잘 모른다'고 답한 국민이 절반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금융연구원 서근우 박사는 "정부는 반기업 정서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산업공동화 현상이 극심해질 것이란 지적도 있다. 또 정 박사는 "재벌은 우군(友軍)이 하나도 없어 수년 내에 사라지고, 우량기업은 외국의 투기꾼들에게 다 먹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뾰족한 해결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서 박사는 "선진국들도 처음엔 반기업 정서가 팽배했다"면서 "자본주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나라에서 반기업 정서가 획기적으로 사라지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현 부회장은 "기업의 목적은 정당한 이윤의 극대화며, 사회공헌은 그 다음 문제라는 인식을 정부 스스로 해야 한다"면서 "기업들도 정도 경영.윤리 경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용성 회장도 "일부 기업가들이 잘못된 방법으로 기업을 경영한 데 따른 반감도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요즘 기업들은 과거처럼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점을 국민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연구조정실장은 "반기업 정서가 한국적 특수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기업들은 일부 수용해야 한다"면서 "시장경제체제 유지를 위한 투자에도 적극 나설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

<자문위원>
김용열 산업연구원 기업정책실장.김정호 자유기업원 부원장.서근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임영재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최종원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장(가나다순)

<기획취재팀>
김영욱 전문기자.최형규 차장.김창규.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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