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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내어주고 "궁핍"불러들여-30일은 월남 패망 7주년 한인자치회장 이순흥씨가 말하는 적치 하 6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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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30일은「월남」이란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진지 꼭 7주년이 되는 날이다. 다음 글은 사이공함락과 함께 적치 하의 월남에서 6년간 교민의 리더로 일해온 이순흥씨(44)의 수기다. 필자 이씨는 38년 서울태생으로 외국어대 영어과를 졸업했다. 이씨는 수출대리점인 코리아 컨설턴트사의 대표로 있다가 68년2월 월남에 건너가 고철 비철을 수출하는 순전통상을 설립했고 교민회 섭외부장을 지냈다. 월남이 공산화된 후 그는 1백70명의 교민과 함께 남아 재월남 한인자치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선출되어 그 후 6년간 교민들의 생활파 귀국을 위해 애썼다. 이씨는 또 이대용 공사 등 구속된 외교관들을 위해 뒷바라지까지 했다. 이씨는 81년 5월30일 귀국했고 월남에서의 공로로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편집자 주>>
나는 1968년부터 1981년까지 13년간 월남에 있었다. 한국군도 참전한 월남전의 와중에서 7년간, 그리고 월남이 월맹군과 베트콩에 의해 공산화된 후 6년간이었다.
전시에 나는 다낭과 사이공을 오가면서 고철 비철을 모아 수출하는 회사인 순흥통상을 운영했다. 내 밑에는 한국인 직원 10명, 외국인 직원 12명이 있었다.
월남이 공산화되는 운명적인 날인 1975년 4월30일 나는 우리 외교관 6명, 교민 1백 70명과 함께 적치의 월남에 내던져진 신세가 됐다. 월남을 탈출하는 마지막 헬리콥터를 놓쳤기 때문이다.
이대용 공사의 지휘로 우리는 두려움 속에 판딘풍가 53번지에 있는 주월 한국대사관저로 갔다. 모두 쭈그리고 앉았다.

<해변서 우왕좌왕>
나는 그곳에 그냥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교민 몇 명과 함께 사이공해변가로 나갔다. 타고 갈 배가 있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배는 없었다.
3,4대의 트럭에 실린 월남 군인들이 해변가로 몰려왔으나 배를 찾지 못하고 떠났다. 많은 월남 민간인들도 해변가를 가족과 함께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한 국민이 나라를 잃는 것을 보았다.
나는 다시 대사관저로 돌아왔다. 이날 상오 11시쯤 사이공 시내로 월맹군과 베트콩이 들어왔다. 그들의 기를 단 탱크가 대사관저 앞을 지나갔다. 우리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오후에 우리는 대사관저에서 2백m쯤 떨어진 프랑스 병원인 그랍병원으로 갔다. 용케 버스를 한대 구해 타고 갔다.
1백m쯤 갔을 때 사이공중앙우체국 앞 광장에 월맹군 1천여명이 집결해있는 것이 보였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그들 앞을 통과했다.
그랍병원 앞뜰에서 우리는 밤을 새웠다. 다음날 아침 베트콩 10여명이 그랍병원에 왔다. 그들은 10분내로 한국인들이 모두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다시 대사관저로 돌아갔다.
그날 밤 우리는 재월 한인자치회를 조직했다. 외교관들이 입회했다. 죽거나 살거나 자치회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기로 했다. 누구의 추천에 의해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만장일치로 회장에 뽑혔다.
『우리 모두의 생사가 당신에게 달려 있소.』교민들이 말했다. 나는 옆방에 들어가 기도했다. 나 하나가 희생되더라도 교민들이 무사하게 고국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용기가 났다.
그로부터 6년간 나는 교민회장으로 일했다. 일일이 말하지 못할 만큼 많은 고초가 따랐다.

<본국서 돈도 보내>
그러나 1981년 5월28일 사이공을 떠나(그때 사이공은 호지명 시로 이름이 바뀌어져 있었다) 태국의 방콕으로 가는 에어프랑스 747기에 올랐을 때 나는 교민 1백70명중 1명만 남기고(그를 곧 출국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월남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다(교민 중 1명은 간암으로 병사했다). 6년은 긴 세월이었다. 그리고 어느 하루도 고통과 공포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날은 없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곳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교민들의 출국사무를 처리했다.
월맹과 베트콩 점령자들은 사이공 함락 2주일 후 이민국을 설치하고『모든 외국인과 그들의 합법적인 가족에 대해서는 출국을 허용한다』고 밝히고 등록할 것을 명했다. 우리는 믿어지지 않았지만 등록을 했다.
그들의 출국에 대한 약속은 그 후 그런 대로 지켜진 편이다. 그 해 11월부터 한 달에 5∼10명 꼴로 교민들은 출국할 수 있었다. 프랑스영사관을 통해 비행기표가 마련됐다. 본국 정부에서 지원해주었다.
정부에서는 프랑스영사관을 통해 우리가 찾아갈 수 있도록 돈도 지원해주었다. 76년 8월 월남에 남겨진 지 1년3개월이 되었을 때 70여명의 교민이 출국했다.
그 후 매월 2∼3명 꼴로 출국이 이루어져 79년 거의 대부분이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78년7월 출국령을 받았으나 스스로 연장했다.
모든 교민을 철수시키고 구속되어있는 외교관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외교관은 3명이 구속되었다. 75년 6월18일 이민국의 의사과장이 우리가 있는 대사관관저에 와서 안희완 영사와 서병호 총경을 찾았다. 그들은 본인임을 밝히고 짐을 들고 나갔다. 그들이 간 후 우리는 이민국에 찾아가 그들의 행방을 물었으나『잘 있다』고만 말하고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는 그들이 지와형무소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대용 공사는 10월3일 구속됐다. 우리는 그들이 80년 4월12일 석방될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필요한 물건을 차입시키면서 돌보았다.
우리는 그곳에 있는 동안 북한측이 어떠한 위해를 가해올지가 가장 두려웠다. 실제로 북괴의 공작원이 75년 9월20일 한번 찾아왔다.
6년간 월남에 있게 됨으로써 나는 월남의 공산화를 지켜보게 되었다. 공산화로 변해 가는 사회, 그 속에서 고통받는 월남인들을 보았다.

<경찰 군 간부 구속>
월남을 점령한 후 월맹과 베트콩들이 맨 처음 벌인 일은 전범자 처벌이었다. 월남정권의 관리 경찰간부 군 간부는 대부분 구속되었다. 그들은 지와형무소에 감금되기도 하고 하노이로 보내져 세뇌교육을 받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대사관 바로 앞에 살았던 한 경찰중위는 5년만에 반신불수가 되어 가족 앞에 나타났다.
모든 사유재산은 몰수되었다. 75년 9월23일 그들은 화폐개혁을 하여 구 화폐인 피애스터를 모두 거둬들이고 l인당 2백동(그들의 화폐단위) 씩만 바꾸어주고 나머지는 보관증만 써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지신세가 됐다.
직장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이공에서 추방되어 시골에 가서 노동을 했다.
물자, 특히 생필품의 부족은 심각한 것이었다. 쌀과 옷감 등이 배급됐으나 양이 부족했다. 암시장이 생겨났다.
생필품들이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뒷거래됐다. 중국계 월남인들이 외래품을 밀수하여 팔았다. 외래품은 외국인을 위한 상점에서 흘러나갔다.
76년 4월25일 남북월 통일국회총선거가 치러지고 통합이 선언되자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하노이에서 많은 관리들이 내려와 사이공의 요직을 장악했다.
베트콩들은 소외되었다. 하노이에서 온 사람들과 월남사람들 사이에 반목이 커져갔다.
궁핍을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선편탈출을 기도했다. 점령자들은 이를 방관했으며 관리들은 선편탈출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선편탈출을 위해 필요한 것은 금괴였다. 1천2백∼1천5백달러 어치의 금괴를 내놓으면 탈출이 가능했다. 무엇이든지 팔아서 금을 마련하려는 사람들이 암시장에 나와 그들이 가진 귀중품을 팔았다.

<부정 부패 더 심해>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월맹에서 온 관리들은 그들의 생활과 사이공의 생활이 차이가 난 것을 보고 그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려고 애썼다. 돈만 집어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 사회풍조가 되었다.「티우」정권 때의 부패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내가 출국문제나 구속된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해낸 것도 관리들과의 접촉이 잘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의 몇몇 관리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기뻐했다.
오랜 전쟁으로 경제는 피폐되었고 회복되기 어려웠다. 내가 떠나올 때까지 사이공에서는 최소한의 생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치원에서부터 철저한 사상교육이 실시되었다. 어린아이들은 제복을 입히고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쳤다. 주민들은 10가구 단위로 조직을 만들어 저녁이면 모여서 공산주의교육을 받았다. 종교도 제한됐다. 교회는 열리지만 철저한 통제를 받고있었다.
월남인들은 그들이 나라를 잃은 후 자유가 구속되고 경제적으로 고통스럽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그들은 월맹에서 온 사람들을 하노이치라고 부르면서 멀리했다.
그들을 해방시켜주겠다고 한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구속을 받고 나서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운명을 잘못 선택했으며 그들이 노력했더라면 다른 운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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