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없는 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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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계최고의 살인기록은 19세기 인도인 「브람」의 9백31명이다. 그러나 그건 50년에 걸친 살인이다.
한국의 기록은 75년 김대두의 17명이다. 그건 두달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이번 우순경의 만행은 불과 6시간 동안에 56명을 살해한 점에서 기록적이다.
77년 뉴욕의 살인마는 「동기없이」범행을 했다. 6명의 금발미녀를 죽이고 7명을 부상시킨 그는 다만 『「샘」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샘」은 그가 첫범행후 만난 이웃노인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샘」은 그에게 살인을 명한 머릿속의 「광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범행은 소외와 고독의 정신적 고통에서 촉발된 것이란 분석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스탠퍼드대학의 정신병학자「로널드·랜디」는 75년 『살인과 광기』란 그의 저서에서 현대인들이 자신의 곤경의 책임을 사회로 돌리고 그 울분을 타인에게 터뜨리는 경향이 늘고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전통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대의 사람들은 좌절을 당하면 자살을 선택했지만 지금은 살인을 저지른다.
절도없는 자녀교육, 자립정신의 쇠퇴, 정부의 부패와 위선, 종교의 쇠미 등도 그 원인이 됐다.
살인행태를 인간의 공격본능과 연결짓는 경우도 있다.
힘과 활동의 과잉으로서 나타나는 본능적 공격성은 동물적인 공격성같이 필요를 충족시킬 목적만을 갖고 있다. 욕구가 충족되면 공격성이 나타날 여지가 없게되는 점에서 심각성은 오히려 낮다.
그러나 인간의 증오심은 이완 다르다. 증오심은 꾸준히 세련되며 집요하게 증폭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당한 이유」와 「번듯한 논리」를 갖고 있는 경우도 많다. 「히틀러」의 논리요, 「샘의 아들」의 이유다.
희생자는 스스로 피하려고 할뿐이지만 증오하는 가해자는 옳지 못한 자기의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증오의 염」을 불태운다.
증오는 내적 불안이며 증오하는 자 자신의 허구다. 그를 공격적으로 만드는 것도 그 허구가 만드는 불안이다.
그는 자기의 불행이 자기이외에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속으로는 자기의 책임과 자기의 죄를 안다. 그래서 자기를 괴롭히는 죄악감을 없애기 위해 죄도 없는 다른 사람을 해친다. 「책임전가」의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대상없는 증오」 (sinat rhinam)다. 동기없는 살인의 심리상태다. 하나의 정신병이다.
그러니까 의령의 살인광도 사실은 정신병자다. 자신의 무능과 책임을 사회와 이웃에 전가하려던 「대상없는 증오」의 화신이다.
우리 사회의 병리가 낳은 이런 정신질환자들이 또다시 광기를 폭발시키지 못하도록 마음을 써야겠다. 이런 자에게 총을 주어서도, 뺏겨서도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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