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코리안] 이집트에 태권도 보급 16년간 대표팀 이끌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이집트 카이로 남부의 주택단지인 마디내의 한 상가 건물.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함성이 터진다. "준비" 소리에 이어 "하나, 둘, 셋, 넷"의 기합소리다. 100㎡ 규모의 코리아 태권도장. 푸른색 매트리스 위에서 10여 명의 이집트 어린이가 외치는 한국어 구령이 무척이나 야무지다. "이집트 손자.손녀를 보고 있으면 절로 신이 납니다." 아이들과 함께 땀을 흘리는 정기영(59.사진) 사범의 얼굴엔 미소가 흐른다.

그가 이들을 손자.손녀로 부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20년 전부터 가르쳐온 제자들의 아들.딸들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예전에 배웠다며 아이들을 맡아 달라고 부탁할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어린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이집트 최고의 태권도 지도자로부터 배운다는 자부심이 있다. 여덟 살의 초등학교 여학생 자즈야는 태권도 8단인 정 사범을 가리켜 "최고의 사범님한테 배우는 것이니 잘 배워야 한다고 아버지가 여러 번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정 사범은 특히 지난해 아테네 올림픽에서 주가를 올렸다. 이집트 태권도 선수가 중동.아프리카를 통틀어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1984년부터 한국인으로선 최초로 이집트 대표팀을 맡아 온 그였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한 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해 감독 자리를 내놓는 아픔도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 이집트 대표팀을 위해 그는 스파링팀을 이끌고 가 연습을 돕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비록 동메달이었지만 이집트가 태권도에서 첫 메달을 따내자 모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집트 태권도계가 그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순간 "20년의 노력이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정 사범은 이집트에 뼈를 묻을 때까지 태권도를 전파하겠다고 말한다. "태권도는 최고의 수출품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은 카이로 내 스포츠 클럽에서 수백 명의 이집트 청소년을 지도하고 있는 정 사범의 말이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