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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학교 담장에알록달록 꿈 입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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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영일초등학교 내 놀이터 담장에는 최근 색색의 꽃과 별 등이 주렁주렁 열렸다.

학교는 자동차 소음이 끊이지 않는 동네에 자리잡고 있다. 학교 정문 앞으로 서울 시내 주요 간선도로 중 하나인 남부순환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이다.

학교 뒤편 고지대는 가정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차 녹지도 거의 없는 곳이다. 이런 '회색' 공간이 새 풍경으로 태어났다. 이 학교 3~5학년 어린이 1백40명의 고사리 손이 칙칙하던 시멘트 담장을 동심이 담긴 벽화로 덮은 것이다.

미술가 임옥상(53)씨가 이끄는 미술 모임 '에꼴드가나'가 어린이들과 4월 한달간 벌인 공동 작업의 결과다. 모임에는 김옥의(50).이강분(39).유다희(26).김아미(24)씨 등 네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미술이 일반 대중과 격리돼 있었다. 삶의 공간을 아름답게 바꿔나가는 데 미술가가 적극 앞장서야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영일초등학교는 전국의 학교 6곳을 선정해 올해 말까지 학교 담장.놀이터 등을 아름답게 가꾸는 '꿈 꾸는 별이 뜨는 학교' 프로젝트가 적용된 첫 사례다. 국민은행이 경비를 지원하고, '에꼴드가나' 미술가들이 자원 봉사 차원에서 아이들과 '학교 가꾸기'에 나서는 프로젝트다.

에꼴드가나팀은 서울 지역 10개 학교를 답사한 뒤 영일초등학교를 선정했다. 서울 남부교육청에서 '특수 복지 지원학교'로 지정할 만큼 학생들의 가정 여건이 어려운 곳이다.

프로젝트는 철저하게 어린이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3.4학년 각 한 학급, 5학년 두 학급 등 네개 반을 골라 교실 수업을 하며 어린이들의 동참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냈다. 미술가들이 강사로 나서 학급별로 한시간씩 미술 수업도 했다.

미술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이 수업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임씨가 말했다."여러분이 써낸 종이에 이런 말이 있네요. '나는 사업가가 될 것이기 때문에 미술이 필요없다'." 한 아이가 "저예요"라고 수줍은 듯 작은 소리로 '자수'를 했다.

"사업을 하면 미술을 몰라도 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사회 어디에도 미술과 관계가 없는 분야는 없어요.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고, 표현할 줄 모르면 불행한 사람이 되죠."

아이들은 미술가들이 준비해온 '시바 툴'이라는 합성수지로 벽화에 붙이고 싶은 모양을 빚어냈다. 찰흙처럼 반죽을 할 수 있는 재료라서 신기해했다. 아이들 손에 의해 축구 선수 안정환도 만들어지고, 토끼.자동차.꽃 등도 생겨났다. 아이들은 머리가 다소 긴 임씨를 '안정환 머리 아저씨'라고 부르며 장난을 걸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달 21, 28일 어린이들은 미술가들과 함께 21m 길이의 담장 앞에 섰다. 미술가들은 여러 가지 색깔의 특수 안료를 섞은 시멘트를 정사각형 모양으로 담장에 바르고, 아이들은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렸다.

담장에는 출렁이는 바다가 자리잡았고 바다를 떠다니는 조각 배도 등장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도 나타났다. 소설 '어린왕자'에 나오는 그림이다. 장난스럽게 자기 이름을 크게 써넣는 어린이도 있었다.

그림이 마른 다음에는 잘게 부순 색색의 타일 조각을 그림에 붙여 모자이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시바 툴' 완성품을 붙였다.

처음 해보는 작업에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5학년 귀현이(10)는 손을 뻗어 담장 높은 곳에 커다란 나비를 붙였다.

"처음에는 애벌레를 만들려고 했는데, 촌스러운 것 같아 나비로 만들었어요. 근사하죠."

귀현이 친구 세진이(10)는 만화 드래곤볼에 나오는 괴물 '마인부'의 얼굴을 세진이의 나비 옆에 붙였다.

"서울 강남 등지에서는 예체능에도 사교육 열풍이 분다고 합니다.하지만, 우리 반에는 미술 학원에 다녀본 적이 있는 애가 거의 없어요." 담임 교사 오정숙(26)씨는 "미술가들과 함께 해보는 미술 체험이 두고두고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가 유다희씨는 "아이들이 벽화에 담아낸 아이디어가 매우 다양하고 참신해 놀라웠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28일 오후 봄 햇살이 놀이터에 긴 그림자를 드리울 쯤 벽화는 완성된 모습을 나타냈다. 벽화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아이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흘러넘쳤다.

임옥상씨는 "전국 각지의 학교로부터 참가 신청을 받아 올 연말까지 추가로 다섯개 학교를 찾아갈 것"이라면서 "여건만 마련된다면 앞으로도 몇년씩 계속해 이 사업을 진행하고 싶다"는 '욕심'을 비쳤다. 꿈꾸는 별이 뜨는 학교 홈페이지는 (www.kbdream.co.kr)이다. 전화는 02-3779-8932.

성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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