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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E 미국서 끝내자마자 일본서 한 방 … 원화 이틀새 2% 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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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이건 스텔스 전쟁이다.”

 마이클 케이시 월스트리트저널(WSJ) 경제평론가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자 칼럼에서 한 말이다. 통화전쟁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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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시는 “대공황 때처럼 대지를 불태우는 전면적인 통화전쟁은 아니다”며 “이런 와중에 일본이 또 한방의 총을 쐈다”고도 했다. 그의 글엔 칼럼니스트 특유의 극적인 표현이 가득하다. 단 지난달 29일 미국의 양적 완화(QE) 종료와 31일 일본의 QE 확대로 세계 외환시장이 혼돈스러워졌다는 그의 진단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29일 이후 이틀 새 미국 달러와 견준 엔화 값은 3% 넘게 떨어졌다. 미국의 QE 종료를 틈타 엔화 값을 최대한 떨어뜨리려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의 의도대로 된셈이다. 엔화처럼 의도된 가치하락이 아닌 경우를 제외하면 한국 원화가 가장 많이 떨어졌다. 이틀 새에 2% 주저앉았다. 이어 체코의 코루나(-1.01%) 유로존 유로(-0.81%) 스위스 프랑(-0.56%) 순이었다.

 시장의 요동은 뜻밖의 통화 가치를 올려 놓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페소 가격이 0.28% 같은 기간 올랐다. 이어 멕시코 페소(+0.14%) 인도 루피(+0.05%) 인도네시아 루피아(+0.04%) 순이었다. 로이터 통신은 “아르헨티나 페소 등은 미국이 QE를 끝내면 타격을 받을 수 있는 화폐들이었다”며 “미국과 일본의 엇박자 통화정책 탓인지 이들 통화 값이 일단 올랐다”고 보도했다.

 시장의 혼돈은 러시아의 기준금리 인상을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러시아 중앙은행 여성 총재인 엘비라 나비울리나는 1일 오후 전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단번에 1.5%포인트 올려 9.5%로 결정했다. 시장 예상(0.5%포인트)을 뛰어 넘는 인상 조치였다.

 루블화 가격은 미 QE 종료 이전까지 가장 많이 떨어졌다. 나비울리나의 전격적인 금리 인상은 QE 종료가 낳을 충격을 막기 위한 충격요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블룸버그는 “금리인상 효과는 단 2분 밖에 이어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루블화 값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해 사상 최저인 43루블 선까지 밀렸다.

 스텔스 전쟁은 아직 정점에 이르진 않았다. 유럽중앙은행(ECB)도 QE를 단행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WSJ 칼럼니스트 케이시는 “중국도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위안화 값 상승 속도를 좀 더 적극적으로 조절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국내 경제정책 담당자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은행은 일본의 추가 QE 발표 당일인 지난달 31일에 이어 3일에도 긴급 실무회의를 열어 일본의 추가 QE가 국내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미칠 영향을 점검한다. 한은 관계자는 “엔저 충격이 있더라도 금융부문은 복원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수출시장은 일본과 경합하는 업종을 중심으로 악영향을 받을 전망”이라고 했다.

 한은은 올초 ‘엔저 위험요인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위기관리능력 평가)’를 진행했다. 결과를 보면 엔화값이 100엔당 800원대로 하락한다고 가정했을 때 전기전자, 수송장비·기계, 석유화학 순으로 수익성이 나빠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금융연구원 지만수 연구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기업이 중국에 각각 수출하는 100대 품목 가운데 75%가 겹친다. 지 연구위원은 "중국 수출 시장에서 국내 기업이 일본과 경쟁하는 품목은 부품·소재 같은 중간재다. 공급선을 바꾸기 어려운 중간재 특성때문에 최근 1~2년간 엔저 충격이 수면위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앞으론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자, 조선, 자동차, 철강 등 부문에서 일본 제품이 엔화 약세로 가격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중국의 수입선 변화에 국내 기업은 유의해야 한다”고 짚었다. 엔화 약세가 장기화되면 금융시장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엔화값 하락→원화 환산 수출입 변동→기업 수익성 하락→기업 신용위험 증가→은행 재무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강남규·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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