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와 함께 외곬 반평생|광화문우체국 우표전문위원 황우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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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반세기를 우표와 함께 살아온 「우표박사」가 있어 22일 27회 체신의 날을 맞아 화제가 되고있다.
서울광화문우체국 우표전문위원 황우상씨(65·경기도 의정부시 가능2동335).
우표에 관한 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인 황씨는 15살 때부터 우표에 관심을 가져 10만여종의 우표를 수집했고 우표도안에 관한 아이디어 제공, 국내외 우표비교연구 등으로 외곬인생을 살아왔다.
황씨는 54년 한일간에 독도영유권을 둘러싸고 팽팽한 대결을 벌일 때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독도를 담은 우표를 발행하자』는 제안을 해 두 나라간에 기이한 우표분쟁을 일으켰던 장본인.
당시 일본측은 독도우표에 관한 대응책을 마련키 위해 두 차례의 각의를 열었다.
그리고 「마약, 풍기문란문서 등은 수임유포를 금지한다」는 전혀 얼토당토않은 UPU(만국우편연합) 조약을 들고 나와 독도우표가 붙은 한국우편물의 국내반입을 금지시키려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
황씨는 『이 때가 우표와 함께 살아온 60평생 중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라고 회상하면서 그때 발행된 독도우표는 『마누라 이상으로 아끼며 보관하고 있다』고 웃는다.
황씨가 우표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일제하인 1928년. 서울 교동국민학교5학년 때부터.
『일본인 담임선생이 구한국시대 우표를 구한다기에 아버지 사랑방의 서류함에 있던 우표를 몇 장 갖다줬지. 그랬더니 선생님이 고급만년필을 사례로 주지 않겠어.
그때부터 우표가 귀한 것인줄 알고 모으기 시작했어.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표에 미쳐버리고만 셈이야.』
황씨는 최근 만성기관지염에 천식을 앓아 집에서 요양중이나 우표얘기가 나오자 신들린 사람처럼 우표에 얽힌 사연을 털어놓는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우표가 발행된 것은 1884년 11월8일. 김옥균·홍영식 등 개화파에 의해 우리 나라 최초로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우정국이 설립되면서부터. 이때 발행된 우표는 5문, 10문, 50문 등 「문」을 화폐단위로 한 5종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24일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자 우정사업도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10년 동안 우리 나라는 우편의 공백기를 맞았다.
황씨는 19세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만주, 봉천(현 심양), 북경 등지를 돌며 당시 세계각국우표의 75%에 해당하는 6만5천여종을 수집했다.
그러나 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하면서 중공정부의 「골동품 해외반출금지정책」으로 그동안 수집한 우표를 중국인에게 헐값으로 넘겨버리고 만것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황씨가 우표제작에 직접참여하키 시작한 것은 해방후인 56년 광화문우체국에 기원으로 취직, 체신공무원을 시작하면서부터.
이에 앞서 황씨는 우표수집을 하면서 알게된 임동혁 교수(전 이대음대), 윤지병씨(전 금융조합이사) 등과 함께 49년8월1일 대한우표회를 창립, 15년 동안 상무이사를 맡기도 했다.
6·25 동란중인 51년9월25일 발행된 「우방군참전기념우표」는 참전 16개국 중 이탈리아의 국기를 잘못 그려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이 우표는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과 UN휘장을 중심으로 양옆에 태극기와 참전16개국의 국기를 각각 그려 넣었다고 털어놨다.
별정직 체신공무원으로서 황씨의 봉급은 월평균 38만원선. 외길 25년의 보수로서는 너무 적은 액수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얼굴을 가꾼다는 자부심으로 산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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