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5)|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 (13)|40년대의 권투|김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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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가 선수 생활을 한 50년대까지의 실태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요즈음에 비해보면 실소를 자아내는 무모함이 많고 또 시골 장바닥의 격투기 쇼 같은 엉성한 흥행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전란의 와중에도 항상 l만명 이상의 대관중과 더불어 흥분한 열전이어서 젊음을 불사른 링 위의 낭만은 요즈음 선수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집안 체질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선비들은 유약한 것이 통례. 그러나 선비의 자손인 나의 4형제 중 형님 두분은 그대로 선비 체질인데 비해 나와 동생은 타고난 「주먹」이었다.
할아버지 (김창렬)가 이조말 고종 때 호조 참판을 지냈다. 그러다 호조판서의 교지까지 내려졌는데 할아버지는 벼슬을 싫다하고 충남 공주군 반포면 산골로 내려가 은둔 생활을 했다.
당시 일제 등 외세의 침략이 가열, 나라꼴이 풍전등화였다.
참판의 두 아들 중 둘째가 나의 아버지 김기덕씨로 이 세상에 「서강일」이란 이름을 탄생시킨 분이라는 것은 이미 소개한바 있다.
오랜 세월 무위도식에다 남의 꾐에까지 빠진 아버지는 재산을 거의 잃었다.
내 나이 13살 때였다. 식구가 알몸으로 옛 고향 서울로 찾아왔다.
당시엔 적막한 산야이던 먼지막 (현재 구로구 신도림동)에 오두막 같은 집을 짓고 살았다.
나는 유달리 투쟁적이고 힘이 좋아 싸움이 잦았고 맞아본 적이었다. 그런데 14살 때인 어느날 두세살 위인 호리호리한 몸매의 키 큰놈에게 무심코 도전했다가 난생 처음 호되게 터졌다. 도저히 역부족, 나의 미친 듯한 양팔 스윙은 그저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이때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그 키 큰놈이 잡던 포즈-바로 권투 폼이었다. 『권투엔 안되겠구나. 그렇담 그걸 배워야지.』
다음날부터 나는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권투 시합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한곳에서 쓰다버리려는 글러브를 얻었다.
지금 같은 가죽 제품이 아니고 두꺼운 헝겊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얼마 후 종로의 기독교 청년 회관 (YMCA)에서 복싱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가 가입했다. 수년 동안 열심히 배웠음은 물론이다.
대 프로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야망에 불탔고 복싱 외에도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아무 것도 없었다.
얼마나 외곬이었던지 지금까지 나는 권투 외에 티끌만큼이라도 지식을 가진 스포츠가 아무 것도 없다. 권투를 배우기 전에 먼저 익혔던 스케이트만이 예외다.
43년 일제에 의해 권투가 금지됐다. 그러나 징용을 피하기 위해 군수 공장인 조선 중기에 입사한 것이 다행이었다. 이 직장에서 나의 첫 스승 최일태씨 (현재 여자 프로레슬링 협회장·61)를 만나 매일 30분씩 숨어서 연습을 했다. 최일태씨는 크레인 기술자로 일했으나 이름을 날리던 복싱 선수였다.
그는 나의 은인이었고 하늘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로는 형뻘인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면전에선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45년 해방이 되자 우리는 직장을 버리고 복싱에만 전념했다. 서울 곳곳에 권투 구락부가 생겼는데 내가 다닌 곳은 조성구씨가 경영하던 용산 권투 구락부였다. 조성구 송방헌 최일태 김광수 전점동씨 등이 이때 같이 땀을 흘린 선배들이다.
46년 나는 마침내 프로 선수로 데뷔한다. 플라타너스가 둘러쳐진 서울 운동장 축구장에 마련된 링이 나의 첫무대였다.
상대는 임철제. 4라운드 경기를 정신없이-워낙 흥분했으니-난투로 시종 했다. 감격적인 판정승을 거두었다. 나의 앞길은 창창했다.
이때부터 약 1년간 나는 4라운드 경기에 10번 이상 출전하여 연전연승, 6라운드 선수로 승격했고 8라운드 선수를 거쳐 48년 가을 마침내 톱클래스인 10라운드 선수가 되었다.
당시의 국내 복싱 경기 방식은 보통 엉터리가 아니었다. 도대체 체급이란게 없었다. 선수는 4라운드, 6라운드, 8라운드 및 10라운드짜리 등 4개급으로 나뉜다.
초급 단계인 4라운드 선수는 이수준의 국내 선수들을 모조리 물리쳐야 6라운드 선수가 된다.
6라운드서 8라운드, 8라운드서 10라운드로 승격되는 것도 같은 방식에 따른다.
따라서 같은 6라운드 선수라면 플라이급 꼬마와 미들급 거구끼리 말 붙어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페더급에 불과했던 나의 경우 6·25 이후인 53년에 체급별 경기 방식이 채택될 때까지 무수한 덩치들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6·25에 참전한 미군 중 「모노·케이디」 라는 흑인 병사가 부산에 있었다. 헤비급의 노련한 프로였다. 한국의 철권들이 잇따라 도전했다. 송방헌 정복수 정석제 등 당대의 강자들이었다. 그러나 기껏 웰터 내지 미들급이었다. 모두 5회 안에 KO패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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