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가위질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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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예전에 내가 가르치던 국어 교과서 첫장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나무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나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맘때쯤의 새학기에는 으레 기대에 찬 학생들에게 그 서두를 이런 말로 시작했다.
『내 손에는 가위가 하나 들려져 있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가위이지요.
앞으로 이 가위로 여러분을 예쁘고 멋있게 가위질 해 주겠습니다.
때로는 가위질이 무섭고 아플 때도 있겠지만 아무렇게나 마구 자란 보기 흉한 나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사람의 가위질을 즐거이 받는 푸르고 싱싱한 나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을 할 때 학생들의 눈은 더욱 반짝거렸고 내 가슴속에도 덩달아 신선한 사명감과 사랑이 솟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늘 부끄럽고 부족한 교사였지만 그래도 다시 그때 그 애들을 만나면, 그리고 그 교정을 생각하면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햇살처럼 맑은 그리움이 솟아나곤 한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읽은 일련의 신문기사는 내가 학교에 대하여 이러한 소박한 기억과 값진 추억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울하고 슬프기까지 한 것이었다.
교사가 학생을 반신불수가 되도록 구타했다가 그것이 외부에 알려지려고 하자 기백만원을 주며 무마하려 했다든지, 또 하나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사를 학부형이 쫓아와 마구 폭행하는 바람에 그 여교사는 충격과 비관으로 몸져 입원했다는, 다시 새겨보고 싶지도 않은 기사였다.
스승과 제자가 있는 학교라기보다는 선생과 학생이 있는 교육풍토를 가슴아파한 것이 어제오늘의 현상은 아니었지만 이렇듯 깊은 곳까지 스며든 거칠고 막된 현상들 앞에서 다만 부끄럽고 어이가 없어서 진종일 얼굴을 들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리고 학교란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좀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곳이 분명함에도 다만 입시위주의 합격생 제조에 급급했던 지금까지의 삭막한 교육풍토가 더욱 안타 까왔다.
이것은 입시 제도를 탓하고, 어느 특정한 사람을 비난하고 끝낼 문제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우리들 모두가 경쟁의 발톱과 이기적 계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스스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볼 겨를이 없었으며 결국은 내 아이들의 담임교사에게마저도 흰 봉투 정도의 대접밖에 못하면서 그러한 풍토를 조성했었으니 까 말이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부끄러운 얘기보다는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훨씬 더 많은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음을 나는 믿고싶다.
제자들의 결혼식에는 꼭 목욕재계를 하고 새 옷을 입고 참석하며, 여자제자에게는 시집간 딸에게 하듯이 정초가 되면 두꺼운 속내의라든지 가계부를 보내주시는 한 스승님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신문에 깨알만큼 실린 내 이름 석자를 보시고는 마치 당신 일처럼 좋아하시며 밤늦게 몇십 년만에 전화를 주셨던 초등 학교 담임선생님의 젖은 목소리를 나는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은사의 장례식에 갔다가 끝도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스승이란 육친과 같구나, 하는 것을 절절히 느끼기도 했었다.
사랑의 가위로 어리고 부족한 우리들을 다듬어 주셨던 그 스승들을 오늘은 꼭 다시 찾아 뵙고서 다시 한번 가위질해 주십사고 떼를 쓰고싶은 날이다.【문정희】

<약력>
▲1947년 전남 보성생▲진명여고·동국대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졸▲진명여고교사역임▲1976년 현대문학상수상▲저서=시집<꽃숨><문정희시집><새떼>외 산문집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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