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사각의 혈전 60년⑪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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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울에서 벌어진 기념적인 첫 한일프로복싱의 대결에서 일본의 「야마다·하찌로」를 라이트 한방으로 때려 누인 강한수는 일화가 많은 특이한 복서다.
그 첫째는 국내 챔피언으로서 가장 장수한 것, 즉 라이트급의 한국타이틀을 57년10월에 쟁취한 후 62년11월 이기선에게 넘겨주기까지 무려 5년동안 부동의 아성속에 철권왕자로 군림했다.
다음은 그 무지무지한 펀치력이다. 나는 앞서 테크닉은 서강일, 펀치력은 허버트 강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그것은 60년대 중반 프로복싱이 대중화를 이룩한 이후의 시대에 한정된 얘기다.
강한수는 서울 서대문 영천일대에서 4대째(그의 아들까지 치면 5대째)살아온 토박이다.
이조말 무인이었던 할아버지 강왕균씨를 닮은 강한수는 타고난 뚝심에 무적의 철권이었다.
그의 주먹은 서대문일대는 물론, 서울에서 정평이 나있었다.
각 학교에서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서울시내 고등학교들은 복싱부(물론 아마복싱)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다.
또 그때는 스카우트에 대한 규제조치가 전혀 없었으므로 학교와 본인의 합의만 이뤄지면 언제라도 전학이 가능했다.
그래서 강한수는 무려 7개 고등학교를 전전했다. 그 중엔 동북 성북고 인창고가 포함돼 있으며 나머지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졸업은 삼인고(현재는 없음)에서 했다. 그는 얼마전 『삼인고를 다닌 추억이 거의 없을 정도이나 집에 삼인고 졸업장이 있으므로 그런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고는 실소를 했다.
그의 이러한 경력이 다소 혼란스러운 것은 삼인고 재학 중 동시에 방첩대 소속의 선수였다고 하면 그때의 시대상으로 보아 이해가 갈 것이다. 휴전 직후인 55년도 전후였다. 고교생이 육군상사 계급장을 달고 다녔다.
얼핏 느끼기에 강한수가 복싱선수의 탈을 쓴 l급 주먹패였던 것 같이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운동(복싱)밖에 몰랐고 워낙 힘과 기술이 뛰어나므로 깡패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55년 제36회 전국체전에 나가 라이트 웰터급 우승을 차지, 그의 주먹은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키1백70㎝인 보통체격인데도 그의 라이트훅을 정면으로 맞고 떨어지지 않는 장사도 없었다.
56년 전국체전에도 나갔다. 결승에서 맞붙은 선수가 멜번 올림픽출전 대표선수 백도선. 3라운드 내에 몸이 빠른 백도선은 도망 다니기에 바빴고 강한수는 단 한방을 노리며 쫓아만 다니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요즈음 같으면 『싸울 의사가 없는』백에게 무수한 경고 끝에 실격패를 선언함직한데 올림픽대표의 후광덕분인지 백의 판정승이었다.
이후 프로로서의 강한수는 천하무적이었다.
57년 10월 서울운동장 수영장의 특설링에서 김재덕을 누르고 라이트급 챔피언이 된 후 연승가도만 달렸다.
당시엔 선수층이 얇은 탓도 있었으나 강한수의 무쇠펀치에 겁을 먹고 선수들이 대전을 기피하기 일쑤였다.
복싱에서 해머펀치라는 말이 국내에 처음 쓰여진 것이 강한수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강한수의 별명이 곧 해머펀치였다.
강한수는 우연한 기회에 미국복싱잡지를 보고 미국의 강펀치들이 평소 도끼로 나무 찍기를 많이 하여 어깨와 팔, 그리고 손목의 힘을 강화한다는 것을 배운 후 도끼대신 해머로 맨땅을 두들기는 훈련방법을 창안해 냈다.
도끼를 쓰지 않은 것은 나무등걸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단순히 펀치가 세다는 것만으로 특기할만한 복서가 되진 못한다.
강한수에 있어 해머펀치가 유달리 돋보이는 것은 복서생활 중 상대선수의 펀치가 『단 한번도』그의 눈이나 코 등 얼굴의 중요부분에 맞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근사한 적수가 없었다.
매치가 시작되면 몇회 안에 저 펀치를 맞고 상대가 떨어지느냐가 관심사였다.
따라서 부지런히 잘 피하기만 하면 판정패였다.
라이트급도 경량급이므로 두 선수의 우열이 획일하게 그어지는 일이 드물다. 약4년간 23전23승(12KO승)을 구가하던 강한수에게도 침몰의 때가 닥쳐왔다.
일본원정 중 5·16이 있었고 때마침 신경통을 얻어 1년 이상이나 운동을 중단했다가 62년11월 이기선의 도전을 받았다.
강한수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감지하며 링에 올랐다. 세컨드를 봐주던 이양재에게 『2라운드 안에 날리지 못하면 더 이상 기대할 것 없다』고 말했다.
과연 1년전의 그 주먹이, 그 다리가 아니었고 2라운드가 끝나자 이양재가 한국챔피언십을 타월에 실어 링 위에 던졌다.
임화수·유지광 등과 호형호제하던 그의 매니저 최창수(화랑동지회회장)가 5·16후 계속 건재했다면 강한수의 주먹은 더 생명을 유지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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