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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간가족|낙도의 한집 4식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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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농사일 부인이 도맡아>
『외롭지 않느냐고? 그런건 벌써 졸업 했어라우.』
단 한가구가 살고있는 서해낙도의 주부 윤금례씨(45)는 4식구의 가족이외에 하루에 사람 그림자 한번 볼 수 없어도 이젠 의롭지 않다고 했다.
14년전 전처의 자녀3명(2남1녀)과 함께 보리섬(맥도·전남신안군압해면노룡리)에서 외롭게 살고있던 남편 정남중씨(59)에게 재취로 시집온 이후 그래도 가장 어려웠던 것이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이었다고 윤씨는 실토한다.
섬 넓이 불과 6천3백평의 보리섬은 그 체도인 압해도 서북쪽 모서리와 1·5㎞정도의 좁은 노두로 연결돼 있다.
썰물이 질때 시꺼먼 뻘밭속에서 가늘게 굽이치며 길을 터주는 이 노두도 밀물이 들면 사람 키 몇배 깊이의 바닷물에 덮여버린다. 압해도와의 교통도 이 물때에 따라 트이고 닫힐 수밖에 없다.
윤씨가 이곳에 와 낳은 자녀는 아들만 셋. 대윤군(13), 대철군(11), 인호군(9)이다. 대윤군은 이곳 국민학교 졸업 후 울산에 살고있는 형들에게 나가고 지금은 대철군과 인호군만 남았다.
대철군과 인호군은 가룡리에 있는 국민학교에 다닌다. 물길 건너 걸어서 한시간거리. 하루에 45분씩 물때가 변하기 때문에 형제는 학교에서 단골 지각생, 단골 조퇴생이 될 수밖에 없다.
노두를 건너는데는 어른 걸음으로도 12분 넘어 걸린다. 형제가 하교하는 3시∼5시 사이 밀물이 들기 시작하면 윤씨는 장대를 들고 건너오는 아들을 데리러 나간다. 밭 아래서 찰랑거리던 물로 노두 한가운데쯤 찼을 땐 벌써 무릎을 딛고 아들을 업고 되돌아 올땐 물이 허리에 찬다. 때문에 윤씨가 마중 나가지 않으면 형제는 바닷물에 휩쓸리고 말게된다.
일하다가는 느낌이 와 건너다보면 틀림없이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바지를 걷어올리고 장대를 잡은 모습으로 물을 건너기 시작하는 것이 콩알만하게 보인다고 윤씨는 말한다.

<큰아들과 딸은 육지로>
그럴때면 만사 팽개치고 윤씨는 총알처럼 달려나간다. 바로 그 느낌과 행동은 본능적이고 직감적이어서 한번도 그르친 적이 없다.
『엄만 꼭 나오지라우.』
무얼 믿고 물이 밀려오는 바다를 건너기 시작하느냐는 물음에 형제는 똑같이 이렇게 답한다. 어머니를 철석같이 믿고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벌어지는 형제의 이 드릴 넘치는 하교극이 끝난 후 조그만 고도, 보리섬은 바다에 안긴 채 밤을 맞는다.
정씨의 고향은 보리섬 북쪽으로 멀리 건너다 보이는 매화섬. 어릴 때 매화섬에서 서당을 마친 정씨는 젊었을 때 중국에 건너가 살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했다. 3남1녀의 자녀를 낳고 매화섬 안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으나 20년전 정씨는 아내와 맏아들을 연이어 잃고 말았다. 이 충격으로 정신병까지 얻은 정씨는 친지의 권유로 자녀를 데리고 무인도인 보리섬으로 요양을 온 것이 그대로 눌러앉아 지금에 이르렀다.
60년 5월에 옮겨왔으니 꼭 22년째가 된다. 당시 섬 주인에게 4천5백원을 주고 밭 2천평만 사들였으나 지금은 섬 전체가 정씨의 소유.
보리섬으로 온 뒤 정씨는 몇번인가 아내를 맞아 들였다. 그러나 모두 가난과 외로움에 지쳐 섬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고.
14년전에 맞아들인 부인 윤씨는 섬 출신이 아닌 전남함평태생. 국민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집에서 살림만 하다가 그냥 섬으로 시집왔다.
『시집이라고 오니 삼간초옥에 아이들 셋하고 형편없이 살고 있더라고. 첫날 만조인줄도 모르고 섬돌 위에 신발 벗어 놓았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바닷물에 신발이 그냥 떠내려가고 말았지라우.』
윤씨 역시 가난과 외로움을 참기 어려웠으나 정씨와 그의 자녀를 두고 떠날 수 없어 섬을 나름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산 위의 흙을 퍼다 앞마당 갯벌을 메워 뜰을 넓혔다. 지금은 만조선까지의 앞마당이 1백여평. 밭도 일구어 이젠 모두 3천평에 이른다.
북쪽 암벽에 붙은 석화(굴)는 정씨집의 가장 중요한 영양공급원. 갯벌에서 가끔 잡는 게와 낙지도 별미로 친다.
3년전까지만 해도 근근이 자급자족할 형편이어서 아이들을 국민학교밖에 보내지 못했다.

<겨울엔 김 채취일을>
4년전부터는 이곳 낙도에도 해태 양식 붐이 불어와 겨울 한철 해태 채취 일을 하고 봄에 유채를 기르며 소를 키워 수입원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덕분에 3년전 맏아들을 울산에서 성혼시킬 수 있었고 이어 나이든 자녀들은 모두 형과 오빠를 따라 울산으로 나갔다.
가족4명으론 한결 단출해진 후 정씨 일가는 이제 남은 두명의 자녀를 중·고등학교까지 보내고 싶다고 했다. 울산으로 나가있는 형들도 동생들을 꼭 학교에 진학시키겠다는 다짐을하고 있다는 것.
정씨 일가족 가운데 가장 바쁜 사람은 부인 윤씨.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 보낸 후 집안 일을 대충 끝내고 섬 북편암벽에 가 석화를 딴다. 밭을 갈고 농사짓는 일도 윤씨가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다.
지난16일 아이들의 소풍날을 위해 정씨는 큰 섬으로 나가 3백원짜리 오징어땅콩과자 한봉지를 사왔고 윤씨는 지나가던 고깃배가 주고 간 생태 한 마리를 곱게 말려두었다가 이날의 밥반찬을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전기가 없는 이곳에서 외부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라디오뿐. 바닷가이기 때문에 일기예보를 빼놓지 않고 듣고있다.
우거진 소나무 숲 아래로 노란 유채꽃 띠를 곱게 두른 보리섬은 이체 한참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김증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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