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정신건강|김광일(한양대 병원신경 정신과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병 없는 환자도 많다>(9)
병리학을 처음 배우는 의대생들은 교과서에 기록되어 있는 질병 모두가 자기에게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해진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문독자나 라디오·텔리비전 시청자 가운데서도 일어난다.
사람이 먹고 살만해지면 그 다음에 오는 걱정이 건강문제인데 그런 까닭인지 최근 매스컴에서 질병과 건강에 관한 계몽을 많이 하고있다.
모르고 있던 병을 발견하고 올바른 치료대책을 세우도록 계몽해서 국민건강에 이바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부작용도 따른다. 질병기사를 읽거나 그런 프로를 듣고 보다가 문득 『내가 바로 그 병에 걸려있구나』하고 생각, 그 순간부터 불안과 공포에 휘말려드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건강하던 사람이 심장병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이런 느낌이 들면 불안하니까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진다. 그러다 보면 그것을 심장병증세라고 착각한다. 병원응급실로 달려가기도 하고 약국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자세한 진찰 끝에 의사가 병이 없다고 해도 일시는 안심되지만 곧 『의사가 오진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생겨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며 종합진찰만 받는다. 이런 상태를 질병노이로제, 혹은 질병공포증이라고 한다.
질병노이로제는 실제로는 병이 없는데도 마치 큰 병에 걸려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안해진 상태를 말한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어떤 병의 증세마저 나타나면서 꼼짝 않고 들어 누워 평생을 보내는 분도 있다. 병 없는 환자노릇을 하는 것이다.
어떤 질병이 의심될 때는 의사의 철저한 진찰을 받도록 한다.
그 결과 병이 없다는 진단이 내려지면 그 진단을 믿고,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불편한 증세가 몸의 병 때문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불안한 탓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불필요한 정력과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몸의 병이라고 생각하면서 조바심하고 있는 한 해결의 길이 없어지고 깊은 자기착각의 늪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자기 마음 속에서 찾고 현실적인 대책을 펴나갈 때에만 비로소 질병노이로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왜 내가 질병공포에 빠졌나』 『내가 불안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활주변과 자기 성격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의사가 『당신은 병이 없소. 신경정신과에 가서 진찰 받아보십시오』하고 권하면 『내가 미친 줄 아시오』하고 대드는 분이 종종 있다.
신경정신과에 와서도 『나는 마음의 문제가 하나도 없소』하고 진찰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런 환자의 경우 실제는 엉뚱한 곳에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진급이 안될까봐 불안했다거나 남편이 바람을 피울까봐 불안했다거나 하는 이유들이 질병공포증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확신을 가지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해서 해결해나가는 사람에게는 질병노이로제가 생기지 않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