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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후반의 첫 국교동창 모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40대도 후반에 접어들어 뒤늦게 국민학교 동창회를 연다는 소식은 그날까지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날 상당히 많은 남녀동창생들이 다방에서 만나 자기 소개와 인사교환을 하고 안부를 묻는 분위기는 너무 정겹고 들떠 가슴이 뿌듯해왔다. 한적한 산장으로 자리를 옮겨 형식적인 식순에 이어 진수성찬으로 술이 곁들인 점심식사가 끝나고 여흥이 시작됐다.
카세트라디오에서 빠르고 느린 곡들이 흘러 나으면서 춤판이 벌어졌는데 나는 눈만 멀뚱거리며 고작 손뼉으로 장단이나 치고 있을 수밖에. 멋적은 웃음으로 민망함을 달래고 있는 내 귓전에 『야. 이 맹추야! 이때까지 춤도 배우지 못하고 뭘 했어. 인생이 몇백년인줄 아니? 이제 우리나이쯤 되면 인생을 엔조이 할 줄도 알아야지.』
백번이라도 옳은 말이었다. 열심히 살아온 지난날을 기반으로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으니 보고 싶었던 옛친구들과 하루쯤 마음놓고 즐긴다해서 탓할 것이야 있겠는가. 춤이야 못 추면 어때. 구경꾼도 있어야 하고 손뼉이라도 쳐줘야 신들이 나겠지 하는 마음에 열심히 분위기를 맞추면서도 생각은 자꾸 잠겨들었다.
아침에 집을 나올 때의 그 순수했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나만이 대열에서 낙오된 듯한 씁쓸한 기분이 자꾸 엄습해오는 것이었다. 어딘가 허전한 마음이 밀물처럼 가슴에 차오름을 금치 못했다.
총무의 회계가 시작되고 매월 적립할 회비에다 당일 회비 1만원을 합해보니 내가 내야할 돈이 아빠 봉급의 1할이 넘는다. 깜짝 놀란 시골뜨기는 지갑을 톡톡 털 수도 없고 해서 배당된 액수의 반액만 내놓고 총총히 자리를 빠져 나왔다.
자나깨나 근검 절약을 최상의 생활 철칙으로 살아온 자신이 무능하고 밉게만 여겨졌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야 실크블라우스 1벌 값의 반에도 못 미치는 생활비로 살아가는 박봉의 월급장이 아내. 인생이 가진자와 못가진가에 의해 성패의 판가름이 나는 것인가. 어둠을 뚫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생각에 잠겼다.
아니야. 인생이란 똑같은 지점을 출발해서 같은 코스를 달리는 마라톤 같은 것은 아니다. 각기 다른 지점에서 떠나 각기 다른 코스를 달리는 경주가 아닌가. 평탄하게 행복을 누리고 사는자가 있는가 하면, 좀 험난한 코스를 달려야하는 인생도 많은 법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충실히 최선을 다해 사느냐에 의의가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하니 멀리 어둠 속에서 뚜렷이 비쳐오는 우리집 창문의 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정겹고 훈훈해 보였다. <경남 밀양군 상남면 위림 1구3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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