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3. 개화기의 列强 인식 <2> 중국-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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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인가, 침략자인가? 1882년 3천명의 군대로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조선의 내외정치에 직접 간섭하면서부터 중국은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막아주는 보호자인지, 근대화를 가로막는 침략자인지 그 정체가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개화기에 유교적.도덕적 가치를 지키려 한 위정척사(衛正斥邪)나 동도서기(東道西器) 계열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화(中華)이자 문명이었지만, 서구 근대를 따라 배우려 한 김옥균 같은 사람들에게는 미개한 야만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모순된 중국 인식은 일제하에서 냉전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일제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믿음직한 후원자였지만, 6.25 전쟁 이후 냉전시대 남한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국 공산당 정부는 통일을 가로막는 침략자로 보였습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세력들에게 사회혁명의 이상을 같이하는 동지였고, 냉전시대 북한의 위정자에게는 '제국주의 미국'의 침략을 물리쳐준 독립의 옹호자였습니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는 모호한 감정을 갖게 된 이유 역시 냉전적 세계관과 이념체계의 영향뿐 아니라 중국이 개항 이후 행한 후원자이자 침략자라는 이중적 역할의 영향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적국, 북한의 형제국이란 구시대의 고정관념에 기반을 둔 중국 인식은 냉전해체와 한.중수교(1992) 이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시장이자 기회의 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중국이 남한 사람들에게 적국이란 낡은 이미지 대신 경제발전의 동반자이자 세계시장의 경쟁자로 비추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 현안이 된 핵 보유 문제가 웅변하듯 북한의 위정자들에게 중국은 더 이상 운명을 같이 할 만큼 믿음직한 후원자나 보호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경험에 비추어볼 때 화이론(華夷論).냉전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이나 이념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중국이 적이나 동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지만, 힘이 곧 정의인 지금은 침략자일 수도 혹은 후원자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 다시 돌아온 약육강식의 시대에 우리 눈에 맺힌 중국의 이미지는 동반자일까요 침략자일까요? 아마도 중국의 향후 역할은 우리하기에 달려 있겠지요.

종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비교해보면 그 척도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인들이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식민지 지배를 이유로 일본에 보인 적개심과 증오감에 비해 병자호란과 1882~1895년 간의 준 식민지배, 그리고 6.25전쟁 개입 같은 중국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형평을 잃을 만큼 관대하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입니다. 거시적으로 볼 때 근대 이전에는 중국에서 발원한 '문화'란 이름의 강물이 동류(東流)하여 우리 문화의 토양을 살찌웠지만, 지금은 개항 이후 서구 근대의 여러 가치를 자기화한 다원적 시민사회, 경제성장, 그리고 역동성으로 상징되는 현대 한국 문화가 중국으로 역류하는 한류(韓流) 현상을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류(韓流)와 한류(漢流). 선생님의 지적처럼 현재 우리 사회 일각에 동양을 비하하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오늘의 중국을 내려다보는 풍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각이 고정 관념화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중국을 알려고 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 유학 붐이 상징하듯 중국의 장래를 낙관하는 경향인 한류(漢流) 역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중국 젊은이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한류(韓流)와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 배우기가 상징하는 한류(漢流)가 제대로 합류한다면 지식인들의 지적 공동체 복원은 물론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거리도 좁혀져 두 나라가 가치를 공유하며 더불어 사는 날도 머지않아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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