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8)<제 76화>화맥인맥(97)|첫 일본 전시회|월전 장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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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73년3월9일부터 14일까지 동경 은좌에 있는 마쓰야 백화점 7층 화랑에서 「장우성 동양화전」을 열었다.
사단법인 일한친화회(회장 영목일)와 장우성후원회(대표 송환 장)가 공동주최하고 주일 한국공보관과 일본 매일신문사 후원으로 첫번째 일본 전시회를 가졌다.
일한친화회는 한국을 이해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인데 회장인 영목일씨는 명함 뒤에 아예 「일본은 한국에 큰 빚을 지고 있다. 한국은 훌륭한 나라다」고 한국 예찬사를 박아 가지고 다녔다. 그 영목일씨의 아버지는 과거 일본 수상을 역임했다.
마쓰야도 미쓰꼬시 맞먹는 권위 있고 큰 백화점이어서 아무나 이 백화점의 화랑을 대여하기가 힘들었다. 적어도 l년 전에는 예약해야 전시회가 가능하다. 그런데 영목일씨의 전화 한 통화로 난색을 표명하던 마쓰야백화점이 쾌히 화랑을 내주었다.
나의 후원회장을 맡은 동어 송환 장씨는 일본의 유명한 서예·전각가다.
오창석 연구의 l인자일 뿐 아니라 그의 그림도 수장하고 있고, 『오창석 서화집』도 출간한 사람이다.
개막식 날은 당시 주일 한국대사이던 이호씨가 나와 테이프도 끊고, 그림도 한 점 사줬다. 이 대사 부인이 내게 그림공부를 해서 나와는 오래 전부터 아는 터였다.
나의 일본 개인전 때는 신전에 있는 한국 YMCA에서 한국서적센터를 경영하는 임배근 사장이 애써주었다.
작품운반이며 통관 등 어려운 일을 말아서 처리했다.
전시기간 중에는 선전시대 심사위원을 역임한 가등송림이 찾아왔다.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지방에서 살고 있는 가등이 일한친화회의 초청장을 받고 내가 전시회 한다는 걸 알았다며 단숨에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다 쪼그라진 노인이 전시장에 들어 서 나를 보고 『이거 얼마만이오. 그 동안 잘 있었소』하고 꼭 껴안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선전시대 한국에서 작품 활동하던 일본 서양화가 산구장남(당시 무장야 미술대학교수)씨도 전시장에 찾아와 축하해줬다.
산구씨는 수화(김환기), 도천(도상봉)과 가까이 지내서 나도 잘 아는 사람이다.
내 전시 중엔 마침 김인승씨가 자기 전시회를 준비하러 동경에 왔다가 들러주었고, 신용호 교육보험회장도 출장 중에 찾아와 축하해줬다.
전시 중엔 일본신문 미술담당 기자들의 인터뷰도 있었고, 일본 미술평론가들의 평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뻤던 것은 일본 애호가들의 『진짜 동양화다운 그림이다』는 촌평이었다.
어떤 중년신사는 내 그림 2점을 사면서 『지금 일본에는 동양화가 없다. 모두 양화풍의 동양화인데 진짜 동양냄새가 나는 그림을 처음 대했다』고 좋아했다.
어떤 평자는 『일본화는 프레임까지 싸늘한 알루미늄으로 해서 포근한 맛이 안 나는데, 월전 선생 작품은 나무액자로 표구해서 정말 동양적인 맛이 난다』고 마치 동양적인 것에 굶주린 사람처럼 말했다.
전시회를 끝내고 임배근 사장이 『여기까지 와서 북해도를 못 보고 가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그의 재벌 친구인 박준용씨에게 연락, 삿뽀로에 갔다.
삿뽀로는 3월인데도 눈이 수북히 쌓인 북극이었다. 꼭 우리 나라 겨울 풍경을 연상케 했다. 삿뽀로에서 하루를 묵고 박준용 사장의 캐딜랙으로 노보리베쓰 온천으로 향했다.
엉성한 가리개뿐인 남녀혼탕은 남녀 관광객으로 누드 촌을 방불케 했다.
우리가 묵은 산장 뒤에 좋은 구경거리가 있다고 해서 호기심에 끌려 가보았더니 「지옥의 골짜기」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니까 온천폭포가 있었다. 떨어진 물이 부글부글 끓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부글부글 끓는 물에 계란을 망에 담가 쪄 가지고 관광객에게 파는 얄팍한 상혼도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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