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 이제는] 2. 송금액 따라 다른 이체 수수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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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만9000원 보내면 1000원, 10만1000원 보내면 1500원 '. A은행의 자동화기기를 통해 다른 은행으로 돈을 보낼 때 고객이 내야 하는 '타행이체 수수료'다. B은행도 10만원 이하와 초과로 나눠 각각 1000원과 1300원의 수수료를 받는다. 국내 은행 중 신한.조흥은행을 제외한 은행들은 대개 10만원을 기준으로 300~500원의 수수료 차이를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은행들은 '원가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송금액이 많아질수록 위험(리스크)이 커지기 때문에 수수료를 더 받는다는 것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은 사실이 아니다. 금액이 많건 적건 타행이체에 드는 비용은 똑같기 때문이다. 타행이체 원가는 현금입출금(CD)기 등 관련 기기와 전산망 유지 비용, 인건비, 은행간 계좌이체를 대행해 주는 금융결제원 수수료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 기기 및 전산망 유지비는 송금액이 아니라 운영 시간에 비례한다. 켜놓는 시간에 따라 시스템 운영비와 전기요금이 많아진다. 1000만원을 보낸다고 해서 1만원을 보낼 때보다 전기료나 전산망 이용료가 더 들어갈 리 없다.

타행이체 때 은행이 금융결제원에 내는 수수료 역시 금액과는 무관하다. 금융결제원은 은행들에서 분기별로 한차례씩 받는 분담금을 금액이 아닌 거래 건수를 기준으로 매기고 있다. 은행들끼리 주고받는 수수료도 정액제다. A은행의 고객이 B은행의 자동화기기를 이용해 송금할 때 A은행이 B은행에 지불하는 돈은 건당 400원으로 통일돼 있다. 요컨대 송금 규모에 따라 타행이체 수수료가 달라질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는 은행들이 인터넷뱅킹이나 텔레뱅킹을 통한 타행이체 때 400~800원의 단일 수수료를 적용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가 차이는 없지만 고객들이 누리는 편익이 달라 수수료를 달리 매긴다'고 주장하는 은행들도 있다. 하지만 이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은행들은 외환위기 이후 앞다퉈 수수료를 올리며 '수익성 향상을 위해서는 원가를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외쳐왔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자동화기기를 통한 타행이체 수수료를 달리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수작업으로 송금이 이뤄지던 수십년 전의 '관행'이다. 자동화기기나 전산망이 불완전했던 시절엔 고객이 창구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전표 등 관련 서류가 창구직원, 지점, 본점, 타은행 본점과 지점을 거치며 돌아다녔다. 실수나 오기에 따른 사고 가능성이 컸고 은행이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금액에 따라 수수료를 따로 매기는 게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은행간 규모 차이가 크고 전산망이 미비한 미국 은행의 경우 창구에서만 송금이 가능해 타행이체 수수료에 차이를 두고 있지만 세계에서 가장 앞선 온라인 금융 시스템을 갖춘 국내 은행은 이럴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수수료 원가 책정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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