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남녀는 서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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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예전에 여러 나라 여성들과 둘러앉아 얘기하던 중 주제가 여성의 삶을 힘들게 하는 남성들로 흐른 적이 있다. 다른 사안들은 ‘우리나라는 어떻고…’ 하며 의견이 갈렸는데, 남성 문제엔 인종을 초월해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며 열을 받았다. 그러곤 “나라마다 관습과 생각이 이렇게 다른데, 남자 때문에 힘든 내용은 어떻게 이렇게 똑같으냐”며 놀라기도 했다.

 최근 한 여기자 후배는 일본인 기자들과 얘기하다 기분 상했던 대목을 들려줬다. 일본에서 여성 각료 두 명이 ‘정치자금 스캔들’로 사임한 직후 일본 (남성) 기자들은 후배를 보자 “여자들은 안 된다”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산케이신문 한국지국장의 명예훼손 기소에 대해 “여성 대통령이라 문제를 어렵게 만든다”고 덧붙이더라는 것이다. 이게 정말 여성의 문제인가?

 먼저 일본 여성 각료의 정치자금 스캔들. 일본에선 그 후 남녀 각료 불문하고 ‘정치자금 스캔들’이 속속 터져 나오는 걸 보면, 이는 그 나라 정치인의 문제이지 여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를 여성으로 연결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이며 모함이다.

 산케이신문 지국장 기소도 그렇다. 냉정하게 기소할 사안이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많다. 원래 공직자 명예훼손 문제는 기소 사례가 드물고, 유죄를 받기 쉽지 않다는 현실적 관점에서 그렇다. 그러나‘언론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반론에는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 창피하다. 팩트가 아니라 남성의 본능적 상상에서 출발한 낯부끄러운 추측을 휘갈긴 걸 ‘언론의 자유’라고 하는 것 자체가 품위 없는 짓이다.

 의도는 악랄하다. 일부 남성은 자신들의 ‘바람기’를 자랑 삼아 떠벌린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여성은 ‘추문’ 때문에 죽음으로 몰렸다. 여성들은 이런 문화적 경험을 통한 집단무의식으로 인해 ‘성적 모욕=생명의 위협’으로 느낄 만큼 분노하게 된다. 그러니 여성 대통령을 향해 추문 의혹을 들이댄 건 무례함을 넘어 살의가 느껴지는 치명적 공격이다.

 문제는 이런 비열한 공격이 꽤 광범위하다는 거다. 일본인 기자만이 아니다. 설훈 국회의원도 ‘연애’ 운운하며 대통령을 돌려치기로 공격하지 않았나. 그런가 하면 여성을 비난할 때 ‘여자라서…’라며, ‘여성’이란 단어를 열등성의 형용사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에 화내면 ‘속 좁게 군다’며 눙친다. 남성들의 교묘한 여성 공격법이지만 법적 응징은 어렵다. 여성성을 공격 타깃으로 삼는 이런 저열한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사회적 삶은 어려워진다.

 요즘은 여성들이 활발하게 사회에 진출하고, 리더십 자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남녀가 함께 사회를 운영한다. 그럼에도 사회적 인격으로 만나야 하는 일터에 ‘본능적 남성성’을 끌고 나오는 남성이 많다. 과거 남성 사회에선 이게 섞여도 별문제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남녀 함께 사는 세상에선 문제를 일으킨다. 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성군기’ 사고나 직장 성희롱도 사회적 인격과 성적 본능이 헷갈리는 미숙한 남성들이 일으키는 파열음이다.

 여자들은 잘못이 없냐고? 흔히 ‘민지 신드롬’으로 고통받는 남성도 많단다. ‘민지는 손가락이 아파요. 민지는 배고파요…’ 등 의존적 여성성을 끌고 나와 잠재워 둔 남성본능을 흔들어 성 사고를 유발하는 여성도 많다는 반론이다. 인정한다. 어쨌든 본능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사회로 끌고 나오는 순간, 사고가 일어난다.

 남녀가 함께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20년 이상 함께 산 부부의 ‘황혼이혼’이 매년 최대 기록을 갈아치울까. 20년을 살아도 서로 모르는 게 남녀다. 남녀는 같은 지구에 살았어도 역사적·문화적 삶의 형태와 기원이 달랐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사회적 남녀 사이에 ‘아는 척’했다간 사달이 난다. 하나 지금 남녀가 사회적으로 공존하는 지혜를 찾는 건 시대적 과제다. 우선 서로를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편견을 버리고, 예의를 지키려는 노력부터 해 보면 어떨까.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