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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이 터뜨린 "시한폭탄"-방글라데시 군부 쿠데타가 있기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방글라데시의 대카공항과 시내 요소요소에는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경계를 맡고있는 가운데 대카시내는 점차 평정을 되찾고 있다.
관측통들은 이번 쿠데타를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다.
취임4개월만에 실각한 판사출신의 「압두스·사타르」대통령은 집권전에는 강력한 지도자 「지아우르·라만」전대통령밑에서 청렴결백한 이미지를 풍기는 실무적인 보조역이었다.
81년5월30일 「라만」 대통령이 암살되고 「사타르」가 집권했으나 그것은 스스로의 정치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군이 뒤에서 옹립한 것이었다.
내정이 극도로 혼란되어있는 방글라데시에서 76세로 연로한데다 병약한 「사타르」에게 대통령직은 무거운 짐이었다.
이번 정변은 75년 8월 건국의 아버지로 불려지는 「무지부르·라만」대통령 암살후 정치적 혼란기에 군부가 전권을 잡았던 것과 흡사하다고 할수있다.
집권민족주의당 (BNP)은 이슬람색이 강한 보수적인 「아지주르·라만」 수상을 중심으로한 그룹과 「이슬람」전농업상, 「초드리」BNP서기장등 고「라만」대통령의 심복그룹사이에서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야당인 아와미연맹은 작년봄 고 「무지부르·라만」대통령의딸 「하세나·와지드」 여사를 당수로 추대하면서 인기를되찾아 왔는데 내부에서는당수선정을 계기로 당원을 중심으로한 「와지드」파와 학생·노동자를 중심으로 한「라자크」서기장파가 대립, 여당에 대항할 힘을 갖출수가 없었다.
인구 9천만명의 이나라 건국이래 최대관심사인 경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것도 군부의 노여움을 샀다.
작년의경우 한발때문에 쌀생산이 목표 (8백20만t)를 크게 밑도는 7백20만t에 불과했다. 금년의 춘작도 쌀과 소맥을 합쳐 4백50만t (목표는 5백40만t)으로 예상되고 있다.
주식인 쌀이 연간 약2백만t이나 부족한 형편이다.
쌀의 소매가격도 작년11월부터 상승, 금년3월중순 대카에서의 쌀값은 중급이 1셸(약0·9㎏)당 8타카 (약3백40원)로 반년사이에 3타카나 올라 시민생활을 압박하고 있다.
외화준비고도 작년11월에는 l억4천만달러를 밑도는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사타르」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이슬람교국가라는 친분으로 증여7천5백만러,차관7천5백만달러를 얻어와 겨우 국가재정의 위기를 극복했을정도다.
연간개인당 국민소득도 1백50달러로 세계 최저수준을 헤어나지 못하고있다.
47년의 인도·파키스탄 분할로 영국령 인도의 베알지방은 캘커타를 중심으로한 인도의 서벵갈주와 방글라데시(구 동파키스탄)로 나뉘어졌다.
그결과 방글라데시는 공업지대를 잃고 쌀과 황마만의 농업국으로 남게되어 경제자립이 어려워져 외국원조에 의존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한편 그러한 외국원조가 오직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소리도 있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정치적부패와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국가를 구하겠다는 쿠데타의 명분을 제공해왔다.
독립된 서파키스탄(현파키스탄)에 파견됐다가 건국후에 돌아온 엘리트군인의 대표적인 인물이 「에르샤드」육군참모총장이다. 「에르샤드」 참모총장은 이미 해·공군의 양참모총장외에 보그라, 제소르등 주요지역의 지방군관구사령관등 주요 지휘관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언제라도 쿠데타를 일으킬 체제를 굳혀왔었다.
이 세력의 유력한 군간부중에서 「에르샤드」 참모총장의 오른팔이 되어 이번 쿠데타극에서도 각본을 쓴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초드리」군정보부장 (소장) 이다.
「사타르」대통령도 이러한 군의 공기는 잘알고 있었다. 금년1월 군간부와 대통령등이 평의회를 설치했으나 이미 때가 늦어「에르샤드」 참모총장이 이 평의회에의 참가를 거부하기도했다.
군부는 최근「에르샤드」체제로 단단히 뭉쳐졌다.
군내부에 반대세력이 있다고해도 그것은 소규모의 저항밖에 할수 없으리라는 것이 유력한 견해다.
「에르샤드」체제가 안정되느냐의 여부는 방글라데시가 안고있는 낡고도 새로운문제, 즉 경제의 재건여하에 달려있다.【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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