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작가협회 "연예기획사와 공동제작 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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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김형준 이사장

영화계가 연예기획사에 칼을 빼들었다. '스타군단' 매니지먼트사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것. 충무로를 대표하는 영화제작가협회(이사장 김형준, 회원사 60개)는 28일 최근 파워가 급증한 연예기획사의 '횡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한다. '각개 약진'이 강한 충무로 속성상 매우 이례적인 선언이다. 김 이사장(45)을 직접 만났다. '실미도''시실리 2㎞' 등을 만든 그는 올해 충무로 생활 18년째다.

-무엇을 결의하나.

"최근 유행처럼 번진 영화사와 기획사의 공동제작을 거부한다. 영화사들은 스타를 가진 기획사들의 요구를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해 공동제작이란 정체 불명의 제도가 생겼다. '주먹이 운다''잠복근무''파송송 계란탁''B형 남자친구' 등 많은 영화가 그렇게 제작됐다. 기획사들의 지분 참여와 배우 끼워 팔기(스타를 내주는 조건으로 다른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대체 문제가 뭔가.

"기획사들은 스타 하나의 이름을 걸고 수익의 상당액을, 심지어 50%까지 요구한다. 이러다간 둘 다 망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배우들의 개런티도 하루가 다르게 상승 중이다. 이대론 좋은 영화를 기대할 수 없다. 기획사나 배우가 직접 투자하지 않은 작품에 공동제작이란 타이틀을 내세우는 건 외국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다."

-스타파워는 대세다.

"그러나 정도가 심하다. 시장이 훨씬 큰 일본 스타들의 출연료도 대개 1억원 미만이다. 2000년대 충무로가 급속히 큰 건 사실이나 그에 따른 산업적 정비는 미약했다. 스타 캐스팅→고액 개런티→제작비 상승→수익성 저하→스타 캐스팅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영화사 책임도 크다.

"인정한다. 스타 잡기에 연연했으니, 스스로 발목을 잡은 면도 있다. 이번 결의도 기획사와 한판 싸우자는 게 아니다. 충무로 내부 자정의 목표다. 제작환경을 굳게 다지겠다는 뜻이다. 영화는 망해도 스타는 살아남는 구조로는 미래가 없다."

-실효가 있을까.

"회원사마다 절대 공감이 형성됐다. 투자.배급사도 같은 생각이다. 형식적 선언이 아니다. 투자 위험은 나누지 않고 수익만 챙겨가는 일부 기획사의 고압적 태도는 없어져야 한다. 스타로 고민하는 방송계의 지지도 끌어낼 작정이다. 정 그렇다면, 기획사.스타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면 된다."

-실제 그렇게 하고 있다.

"'새드 무비'를 말하나, 아직 극소수다. 그것마저 말릴 순 없다. 그러나 제작의 결정권이 스타에게 넘어가선 곤란하다. 그들을 잡아야 투자자가 'OK'하지 않는가. 감독조차 스타를 만나기 어려운 시대다. 대전제는 수익 불균형을 바로잡자는 거다. 스태프의 처우를 개선하고 싶어도 여력이 없다. 예전과 달리 스타가 조직화.권력화됐다."

-기획사들 반응은.

"공동제작사 말인가(웃음). 여러 차례 만났으나 별 반응이 없다. 우리가 달라지겠다는 데 반발할 명분이 적을 것이다. 지금 충무로는 도약과 추락의 분기점에 있다. 외국에서도 한국영화의 약진을 주목하고 있으나 현재 구조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후배들에게 망가진 충무로를 물려줄 순 없다."

-대안이 있을까.

"영화사도, 기획사도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 잿밥에 눈이 멀어선 안 된다. 사실 많은 기획사도 피해자다. 스타를 끌어들이려고 손해를 마다하지 않는다. 스타와 기획사의 수익 배분이 10대 0, 9대 1인 곳도 있다. 자기 무덤을 파는 셈이다. 모두 센터포워드 하겠다고 달려들면 축구를 할 수 있나. 다들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글=박정호, 사진=김춘식 기자

'국민배우' 안성기의 시각

당혹스럽다. 40여 년간 영화만 보고 살아온 경험을 놓고 볼 때 요즘 상황은 참으로 안타깝다. 영화의 중심축인 제작사와 연예기획사의 마찰은 그 어느 편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충무로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돌탑을 쌓아올리듯 차근차근 자라왔다. 그 동력이 멈추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특정 기획사에 속하지 않은 만큼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돈이다. 오랜 세월 연기를 했지만 지금까지 "얼마 이상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적다"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요즘의 기준에선 바보처럼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방식, 일종의 철학이 있었다. 잘 알다시피 영화는 여럿이 어울리는 작업이다. 혼자만의 욕심을 채울 수 없었다. 돈을 앞세우면 배우의 자존심을 잃어버린다. 목적(영화)과 결과(수입)가 뒤바뀌면 더더욱 곤란하다. 열심히 연기하고, 영화를 사랑하면 돈도 따라온다. 낡아빠진 소리로 들리는가. 그러나 그게 내가 생각하는 진리다.영화사와 매니지먼트사는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영화는 단순 비즈니스가 아니다. 이번 기회에 둘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했으면 한다. 물론 상호 이해와 양보가 전제돼야 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좋은 영화로 보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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