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성추행 고참 쏠 뻔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김정하 정치부 기자

"고참이 제 몸을 더듬는 것을 좋아하더군요. 그놈 이름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최근 전방 GP 총기 난사 사건에 이어 전경.해병대의 알몸 사진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독자에게서 군내 성추행 문제를 고발하는 e-메일을 받았다.

서울 K대 4학년 L씨. 그는 2001년 말 입대해 강원도 ○○사단에 배치받았다. 내성적인 L씨는 60여 명이 함께 쓰는 연대 통합막사에서 고참들의 괴롭힘 때문에 "자살 충동을 스무 번 정도 느꼈다"고 말한다. 특히 L씨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고참의 강제적인 신체 접촉이었다. L씨는 오랫동안 성적 수치심에 시달려야 했다. 군대에서 목숨을 바치는 건 몰라도 상습적으로 인간성이 짓밟히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 고참은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습니다."

L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절박했죠. 마치 김 일병처럼 말입니다. 저도 일주일 전부터 계획했습니다. 공포탄도 8m 안에서 발사하면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야간 근무 후 내무반에 들어오자 저를 유난히 괴롭히던 고참들의 자는 모습이 들어왔고 공포탄을 한발 장전했습니다. 정신이 아주 또렷한 상태였고 정말 딱 네 명만 죽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저 그때 정말 쏠 뻔했습니다."

L씨가 그 시기를 넘겼던 것은 순간의 충동에 인생을 망칠 수 없다는 자제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L씨의 자제력을 미덕으로 삼기엔 우리 군의 현실이 그리 간단치 않다. 지난해 국가인권위가 현역 장병 및 제대 3년차 이하의 예비역 671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군에서 성폭력의 피해를 봤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15.4%나 됐다. 은밀한 성폭력 문제가 이 정도면 관습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반공개적 성적 가학행위들은 또 얼마나 될까.

알몸 사진 파문은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미군이 포로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겨 저항의지를 꺾음으로써 더 많은 정보를 빼내려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번 알몸 사진도 고참이 신참들에게 성적인 굴욕감을 안기고 그들을 무력화하려 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성 학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군 당국이 사병에게 이에 대한 교육을 얼마나 철저히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인권위 조사에서 피해자의 64%는 "으레 있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아서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성폭력을 군 문화의 일부분쯤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이번에 알몸 사진을 찍은 사병도 별 죄의식은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인터넷에선 "그냥 장난 사진인데 그런 것까지 문제 삼으면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반응도 간간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인간의 수치심에 대한 군 당국의 무관심은 큰 참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2, 제3의 김 일병을 예방하기 위해선 구타.언어폭력뿐 아니라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다종다양한 성적 폭력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시점이 됐다.

김정하 정치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