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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 흘러간 주역들<1>|국정의 본산 「세종로 1번지」34년…명멸했던 주역들은 증언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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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세종로 1번지 육중한 석조빌딩에는 가장 어두웠던 시대도 포함해 우리의 근대사가 얼룩져 있다. 이 건물은 역사를 잃었던 시기 「억압의 권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더 많은 기간 국가건설의 열정을 이곳에서 쏟아왔다. 우리들의 중앙청으로서다. 그러기에 이 건물은 쓰임새가 바뀔지라도 민주한국의 산실이던 「중앙청」으로 우리들 기역에 남을 것이다.
중앙청은 행정의 중심부고 지휘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앙청으로 명명되던때 이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건물안에는 초대 대통령의 집무실도 마련돼 이름 그대로 행정의 수뇌부고 중심지였다. 6·25동난 후 대통령집무실은 경무대(오늘의 청와대)로 옮겨갔지만 중앙청이란 이름은 퇴
색되지 않았다. 여전히 국무총리 그리고 각부처 장관이 집무하는 내각의 본부였기 때문이다.
우리 헌정사에서 민주당내각 l년을 빼고는 국무총리가 행정수반이던 때는 없었다.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은 대통령에 의해 선임돼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내각은 단순한 보좌기능에 머물지 않는다. 총리와 각료는 국무회의 구성원으로서 중요국정의 방향을 조타하고 방대한 기구로 행정집행을 주도한다.
그랬기에 우리는 곧찰 ○○○내각이라 해서 총리의 이름을 내각앞에 붙여왔고 방탄내각(최두선총리내각)이니 돌격내각(정일권총리) 정치내각(김종필총리) 실무내각(최규하총리) 등 내각의 특성도 경험하고 지켜봤다.
공화국수립 34년, 행정의 본산이던 중앙청은 내각이 끊임없이 부대꼈던 시련과 격동의 자국들로 가득차 있다. 이 석조전을 중앙청으로 명명한 제1공화국 내각은 폐허위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탄생시킨 선거와 국회 그리고 정당 등 모든것들은 그 이전엔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생소한 제도였다. 내각은 백지위에 규범을 색칠하고 전통을 만들어가야 했다. 각내의 불화, 국회와의 끊임없는 대결은 초기내각의 숙명이기도 했다.
현대국가는 의회의 기능이 줄어드는 반면 강대적으로 행정권이 확대되는 행정국가화의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들의 내각 역시 이런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더 급격히 의회와 행정의 균형이 깨뜨려진 행정우위의 나라가 되었다. 내각을 국정의 중추로 끌어올린 것은 안정과 능률의 논리였다. 이 논리는 60년대 이래 고도성장을 주도한 행정의 성공속에서 자리를 확고히 했다.
이러한 내각이 중앙청을 본산으로한 시대가 막을 내리려 하고있다.
그만큼 내각이 방대해진 것이다. 내각의 성장과 변모는 우리들의 성장이고 변모다. 그런 성장과 변모속엔 수많은 곡절이 쌓여있다. 총리로 혹은 장관으로 중앙청에서 내각을 조타해온 얼굴들은 6백명을 헤아린다.
각료의 평균수명은 1년반. 그 위에 1개월도 못돼 자리를 물러난 장관이 14명에 이른다는 기록들은 이나라 정치와 내각의 격동을 말해준다.
이제 우리는 중앙청시절을 조명할 필요를 느낀다. 내각은 우리들 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지못했다.
그래서 우리들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수많은 비사들이 묻혀진 채 있다. 이들 모든 것은 중앙청을 거쳐간 주역들의 기억속에만 간직돼 끝내 햇빛을 보지 못한채 영원히 묻혀진 것도 적지 않고 또 많은 것들은 희미하게 스러지려 하고있다.
세종로의 중앙청시대가 막을 내리려는 이 시기, 육중한 석조건물에 얼룩진 우리들의 비사를 발굴하는 일은 오늘과 내일의 보다 나은 설계를 위해 요긴하다. 중앙청을 거쳐나간 수많은 주역들의 흐려져가는 기억들을 되살리는 증언을 통해 내각비사「중앙청」을 연재하기로 한다.

<제자=철농 이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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