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읽기] 문학 살찌운 영감의 땅을 찾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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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문학지리·한국인의 심상공간 상·중·하

김태준 외 지음, 논형

각권 424~530쪽, 각 1만9000원

사람에겐 누구나 고향이 있듯이 문학 작품에도 고향이 있다. 물론 김성한의 단편 '오분간'처럼 상상의 공간을 무대로 한 작품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학은 실제의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따라가면 그 배경인 더블린 시를 그대로 복원할 수 있다든지 작고한 소설가 이병주가 지도를 궁구해 가며 데뷔작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썼다는 이야기는 문학과 '공간'의 밀접한 관계를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같은 문학과 장소의 관계를 탐구하는 학문 분야가 문학지리학이다. 1898년 영국 지리학자 아치볼드 기키에 의해 도입됐고 역시 영국의 샤프가 1907년 처음으로 이 용어를 썼다 한다. 그만큼 낯설지만 지리학에서 보면 주관적 경험을 서술한 문학을 통해 특정 장소와 시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연구분과다. 문학으로서도 작품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 유용하다.

이 책은 국내 최초의 문학지리학 학술서라 할 만하다. 4개국 84명의 필자가 한국 문학의 '자리(空間)'와 지리를 살핀 78편의 글을 실었다. 현지 연구와 깊이 읽기를 바탕으로 이 땅에 깃든 문학성을 길어냈다. 이를테면 '천하제일 강산-영동'편에서 천하 문장이 머무는 곳 고성과 신선의 휴식공간 간성, 천하 명승 강릉, 하늘 아래 첫 동네 평창을 두루 살피는 식이어서 한반도 곳곳을 보듬었다 하겠다.

'어머니 나는 법관이 될래요/독학으로 무등산 기록이 될 거예요/가난이 무슨 부끄러움인가요…'란 고정희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나는 처음으로 무등산이 등급이 없는 산을 뜻한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등급이 없는 산, 그래서 엎드려 사는 사람들의 산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조은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의 '기억으로 읽는 광주, 시로 만나는 빛고을' 중에서)란 글을 접하면 광주며, 무등산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책을 보면, 개성은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지나던 수많은 조선조 문사들의 회고와 탄식이 쌓인 그리움의 고장이 되고 김해나 강진도 더 이상 외롭고 쓸쓸한 유배지가 아니라 학문.사상.문학의 요람으로 온전히 재생된다.

여기에 천당과 지옥, 용궁과 무릉도원 등 한국인의 상상의 세계도 더듬고 국외편에선 이민문학, 여행자 문학의 무대가 되는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미국, 러시아, 인도, 몽골 등까지 우리 문학의 지평을 넓혔다.

2년 간 공들였다며 '동국여지승람'의 발전적 승계를 다짐하는 지은이들의 자부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필자 대부분이 지리학자가 아닌 국문학자들로,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한 덕에 읽는 재미도 만만찮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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