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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감상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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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미국 대통령 선거를 3개월여 앞둔 1988년 8월. 조지 부시 당시 부통령의 선거 참모였던 제임스 베이커 재무장관은 TV에 나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틀 뒤 FRB는 특별회의를 열어 재할인금리를 0.5%포인트 올렸다.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은 베이커 장관을 찾아가 "한 시간 뒤에 금리 인상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베이커는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당신이 나의 여기를 한 대 쳤구먼"이라고 말했다. ('마에스트로', 밥 우드워드 지음)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부시는 91년 7월 그린스펀 의장의 임기를 불과 한 달 앞둔 상태에서 재임명을 발표했다.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임기를 한 달 남겨두고 재임명을 발표한 것은 백악관이 그린스펀에게 금리를 내리도록 만들기 위한 조치임이 분명하다"고 꼬집었다.

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린스펀은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금리를 인하했다. 그러나 선거 직전 금리를 한번 더 내리라는 압박에도 그린스펀은 금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같은 해 한국.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9월부터 금리 인하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용만 당시 재무부 장관은 공공연히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고 밝혔지만 조순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인위적 금리인하의 부작용을 강조하며 버티고 있었다. 끝내 금리를 낮추지 않은 조 총재는 다음해 3월 돌연 경질됐다. 임기를 3년이나 남긴 상태에서.

집권 여당과 행정부는 금리 인하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는 예외없다. 낮은 금리로 경기를 살려야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 부동산 및 주식 거품 등 저금리의 부작용은 나중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뒷전의 일이다.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나 사정은 비슷하다. 경제전문가들은 그래서 중앙은행의 독립을 중요시한다.

최근 부동산 거품을 빼기 위해선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자 여당과 재경부는 금리를 올릴 시점이 아니라고 미리 쐐기를 박고 있다. 한은에 강한 압박을 가하는 월권(越權)행위다. 금리 인상이 필요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여당과 행정부가 금리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선거가 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