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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3> 또래 청년들 ‘김정은 패러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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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984년생. 서른 살. 꿈 많은 나이다.

 84년생으로 꿈이 아닌 현실을 만든 사람이 있다. 마크 저커버그다. 세계 13억 인구가 사용하는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그는 상속받지 않고 억만장자가 된 최연소 인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서른 살 한창 취직과 결혼, 사회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우리 젊은이들에겐 한없이 부러운 사람이다. 그야말로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넘사벽)’ 같은 존재다.

 그런 사람이 또 하나 있다. 최근 40일 동안의 잠적으로 관심이 집중됐다가 나타난 84년생 ‘원수’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이다. 북한 권력을 장악하고 ‘원수’의 칭호를 받고 있는 통치자가 서른 살 젊은이인 것이다. 참고로 서른 살이면 배우 스칼릿 조핸슨과 신민아, 가수 세븐 같은 연예인들과 동갑내기다. 하지만 그는 담배를 물고 그 앞에 도열한 아버지뻘 되는 장군들을 ‘지도’한다.

 같은 나이 또래인 한국의 20~30대 젊은이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2년 전인 2012년 7월 18일로 돌아가 보자. 당시 북한은 아침 일찍부터 ‘중대 발표’를 예고했다. 온 국민이 심각하게 그 예고를 주시했다. 심지어 코스피지수가 1%가량 하락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중대 발표 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이 몰려간 곳은 엉뚱하게도 인터넷 사이트인 ‘디시인사이드’의 ‘중앙대학교 갤러리’였다. 중앙대 약칭이 ‘중대’라는 점을 이용, 네티즌들은 중앙대 갤러리에서 “중대 발표 왜 안 하느냐”며 조롱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각한 현실 속 이슈도 인터넷 놀이로 바꿔 버리는 네티즌들이 철없어 보였다. 심지어 ‘전쟁 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낮 12시 북한의 발표는 김정은에게 원수 칭호를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잔뜩 긴장했던 일반 국민은 허탈해했고 ‘중대놀이’ 장난이나 치고 있던 네티즌들의 생각이 결론적으로 옳았던 셈이 됐다.

 네티즌들은 기성 뉴스와 사회가 만들어 내는 지배적 가치체계, 이데올로기에 별로 주눅 들거나 휩쓸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 또래인 서른 살짜리 젊은이에게 어쩌면 질투, 어쩌면 냉소, 어쩌면 허탈함 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과거 ‘때려잡자 김일성’ ‘괴뢰도당 수괴’ 하던 식의 부모세대 구호와는 전혀 딴판이다. 심각한 정치적 판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누군가 인터넷에서 전자출판된 책(ebook)을 읽을 때 추천할 만한 리더(reader) 프로그램을 물어보자 올라온 대답이 김정은이었다. ‘이북리더’라는 동음이의어 장난이다. 그래서인지 김정은 패러디물은 ‘친구를 놀리는 듯한’ 느낌이 많다. 김정은을 합성하는 소재도 만화 주인공이나 게임 캐릭터가 많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하다.

 독특한 김정은의 헤어스타일을 ‘최고존엄컷’ ‘투블럭컷’으로 부르며 세계적 유행이 될 것이라고 넉살을 부리기도 한다. 젊은이들에게 헤어스타일은 중요한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마치 술에서 덜 깬 듯한 표정의 김정은 사진에는 ‘MT 다음날’ ‘어젯밤 술자리가 잘 기억이 안 난다. 어제 분명 007빵으로 마지막에 누굴 쐈었는데…’ 식의 댓글이 붙는다. 이러다 보니, 인터넷의 김정은 이미지는 뚱뚱하고 어리숙하면서도 나름 제 딴에는 진지한 귀여운 캐릭터가 됐다.

 얼마 전 화제가 된 김정은 관련 용어는 ‘적자생존’이다. 김정은이 지도 말씀을 던지면, 나이 많은 북한 간부들이 그 앞에 서서 열심히 수첩에 적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적어야 한다’는 뜻의 적자생존이라는 용어가 부상했다. 유사 용어로 적자인생도 있다.

 하지만 문득 적자인생·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투영해 만들어낸 용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적자가 계속되는,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적자생존의 현장이 현실일 수밖에 없는 그들이기에.

임문영 seerlim@gmail.com

임문영은

온라인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지켜봤다. 1993년 한국PC통신에서 일하면서 『하이텔 길라잡이』를 출간해 ‘길라잡이’라는 이름의 컴퓨터 사용설명서 출판 붐을 일으켰다. 창업멤버로 ‘나우누리’에 들어가 시솝(운영자)으로 활동했다. 이후 iMBC 센터장을 거쳐 ‘시어스’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미디어 전략 컨설팅, 온라인 여론분석 등을 한다. 저서로는 『디지털 세상이 진화하는 방식』 『Do it! facebook』 『디지털 시민의 진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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