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든 「대러시아 애국주의」|공산권 이원화도 제동걸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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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공산당의 수석이론가이며 크렘린의 제2인자이자 막후 조정자로 알려졌던 「미하일·수슬로프」(당정치국원겸 서기) 가 지난 1월말 사망한 후 소련의 권력구조에는 「변화와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다.
최근 미국의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는 소련전문가인 뉴욕대의 「앨버트·위크스」 교수가 쓴 『「수슬로프」이후의 크렘린』이란 글을 실었다. 다음은 그 내용. <편집자주> 「수슬로프」는 보수강경파이론가이자 「브레즈네프」체제를 뒷받침해준 인물로 흔히 알려져왔다. 그러나 그가 해온 역할중 가장 의미깊은 것은 당서기장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숭배나 권력집중을 견제하고 아울러 소련군부의 정치적 야심도 억누르는「균형추」의 역할이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으로 「브레즈네프」서기장과 그 측근의 권력은 금후 한층 비대화하는 한편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다원주의를 허락하지 않는「대러시아 애국주의」사조가 생겨날 위험성이 있다. 동시에 권력중추안에서 군이 갖는 영향력이 강해질 가능성도 크다. 앞으로의 소련권력구조의 모습은 이 두가지 요소가 어떤 상호작용을 하느냐에 마라 달라질 것이다.
「브레즈네프」는 「수슬로프」의 죽음으로 개인적·정치적으로 큰타격을 받았다고 얘기되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수슬로프」의 죽음은 그에게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강경파이론가는 항상 「브레즈네프」지배에 대한 견제역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사실 「수슬로프」는 「브레즈네프」를 칭찬할 때 는 항상 조심스러웠다.
지난해 12월 75세 생일을 맞은 「브레즈네프」에게 보내진 찬사가운데 「수슬로프」의 그것은 아주 약한 어조였다. 다른 정치국원이 「브레즈네프」를 현대의 지도적『사상가』 『전략가』로 이야기한데 비해 「수슬로프」는 「브레즈네프」를 단지 『재능있는 당조직자, 대중의 지도자』로 부르는데 그쳤다.
「수슬로프」는 또 군부의 중요성울 인정하고 장군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긴 했지만 군에 대한 문관의 절대우위라고 하는 제정러시아 이래의 원칙을 굳게 지졌다.
57년 「호루시초프」가 2차대전의 영웅「주코프」원수를 당의 간부회 (지금의 정치국) 에서 교묘히 축출했을 때도 「수술로프」는 중요한 한몫을 했다. 그후 최근까지 「수슬로프」와 다른 정치국원들은 순수한 군인이 정치국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눈을 부라려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이제는 말라질지도 모른다.
폴란드에서 「야루젤스키」장군이 권력을 장악한 사실을 두고 소련의 후계자싸움이 새로운 국면을 맞을때 크렘린에서 일어날 사태의 전조로 보는 소련전문가들이 있다.
소련군부가 평균연령 70세의 늙은 문관들이 지배하는 권력중추부를 눌러버릴 가능성은 결코 배제될 수 없다.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소련에서도 군부는 수도 모스크바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수많은 당과 정부관료들이 부패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있음을 주시하고 비난하고 있다. 정치국안에서 군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군고위층에 「도덕십자군」같은 움직임이 생겨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주슬로프」의 태도는 초강경은 아니었다. 「다중심주의」라고하는 크렘린의 악몽, 즉 각국 공산당이 자주독립의 기치를 높이고 있는 사태를 그는 우려했지만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등의 공산당의 소련에 대한 충성심을 되돌리려 할 때 그가 취한 수단은 설득이었거나 세계의 「진보적 세력」의 회의를 소집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이틸리아 공산당에 대한 크렘린의 공격은 예전보다 훨씬 신랄한 것이었다.
그것은 노선에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외국공산당에 대해 보다 강경한 조처를 주장하는 세력이 대두하고 있는 징후다.
이러한 강경노선의 대두뒤에는 다분히 초애국적인 러시아주의, 또는 예전에 「레닌」이 「대 러시아 광신적 애국주의」라고 혐오했던 사상의 재발이 따라 오게 마련이다.
「수술로프」의 죽음이 낳는 후유증은 이처림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75세의 노쇠한 「브레즈네프」가 사망 혹은 은퇴할 경우 누가 권력의 고삐를 물려받을까를 뚜렷이 점치기는 아직 이르다.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위치정도다.
「브테즈네프」를 제외한 12인의 정치국원중 지금 선두주자로 여겨지는 사람은 「콘스탄틴·체르넨코」(70·당중앙위 행정담당서기)와 「안드레이·키릴렌코」(75·공업담당서기) 다.
두사람 모두「브레즈테프」의 오랜 심복이다. 70년대 후반에 한동안「키릴넨코」가 다음번 지도자라는 예측이 지배했으나 요즘들어선 「체르넨코] 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는 듯하다. 「수슬로프」가 맡았던 당이데올로기 및 국제공산주의 총책이란 요직을「체르넨코」가 물려받으리라는 조짐도 적지 않다. 지난달 프랑스공산당대회에 파견된 소련대표단을 「체르넨코」가 이끈 사실도 이같은 추측을 뒷받침한다. 폴란드사태를 두고 이탈리아·스페인 등 서구공산당들이 소련노선에서 벗어나려는 시기였기에 이같은 임무는 평상시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체르넨코」의 힘은 30년 전 몰다비아 지방에서부터 「브레즈네프」밑에서 일해왔다는데서 나온다. 그러나 개인적인 세력기반은 「키릴넨코」에 뒤진다고 보는 게 정확할듯하다. 「키릴렌코」는 모스크바당지부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며 당서기로서 지방당조직과 간부임명 등에 오래 간여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세력기반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약점은 「브레즈네프」보다도 3개월이나 더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다.
「체르넨코」도 그보다 젊다곤 하지만 이미 70객이다. 따라서 이 두사람 중 누가 권력을 잡든 과도적 역할만 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수상인 「니콜라이·티호노프」(76)나「드미트리·우스티노프」국방상(73), 「유리·안드로포프」 KGB(국가안전위)의장(67), 젊은 유망주인 「미하일·고르바체프」(농업담당서기 겸 정치국원) 등도 현재로선 실력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소련의 권력변동은 아무도 섣불리 짚을 수 없다는 교훈이다.
1917년 공산혁명 후 크게는 불과3번 (「레닌」-「스탈린」, 「스탈린」-「흐루시초프」,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 있었던 권력승계과정에서 관측통들의 예상은 대부분 빗나갔던 것이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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