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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복싱 한물간 동남아 복서만 불러 실속 없는 KO승 퍼레이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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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내 복싱팬들이 한국에서 벌어지는 저질의 수준 낮은 국제경기에 식상해 있다. 근래에 폭발적인 프로복싱 붐과 함께 국내에 원정 오는 동남아 복서(태국·필리핀·일본)들이 허약한데다 불성실한 태도로 했다하면 초반 KO패로 주저앉아 팬들은 짜릿한 통쾌감보다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마련이다.
급기야 한국권투위원회(KBC)는 22일 태국의 「키앗사얌·조커」 선수에게 대전료(1천 달러) 중 3백 달러의 벌금을 물도록 결정했다. 「조커」 선수는 21일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진 이승순(OPBF웰터급 5위)과의 논타이틀 전에서 시종 등을 돌리며 달아나는 불성실한 경기로 두 차례 경고 끝에 7회 KO패 당하고 말았다.
이같은 경기태도로 KBC는 국내 프로복싱사상 처음으로 대전료 압류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 조처는 KBC경기규칙 제 19장 78조 『경기 중 전력으로 대전하지 않고 고의의 반칙 또는 경기규칙을 위반한 선수는 응분의 처벌을 받으며 출전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당한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한국복서로는 허버트 강이 지난 69년 10월 24일 하와이 원정경기에서 1천 5백 달러의 벌금을 지불한 일이 있다. 강 선수는 미국의 「베이비·캐시어스」와 10회전 경기를 벌였는데 시종 방어에만 급급하다 관중들의 야유 속에 판정패 당하고 대전료(5천 달러) 중 일부를 벌금으로 지불한 것이다. 돈과 곧바로 연결되는 프로복싱과 관중과의 관계는 물고기와 물과의 관계로 비유된다. 따라서 관중들에게 혐오감을 줄 정도의 불성실한 복서는 징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프로복싱은 국내에서 가진 외국복서와의 경기에서 1백 49승 10패 3무로 92%의 어마어마한 승률을 올렸다. 이는 한국복서들이 해외원정에서 거둔 15승 35패 1무와 크게 비교된다. 그러나 올해 들어 22일 현재 국내에서 열린 국제경기에서 한국복서들은 24전 전승에 22KO(대 태국 12KO, 대 일본 8KO, 대 필리핀 4승 2KO)로 KO율 92%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복서들이 이같이 강한 것인가 혹은 외국복서들이 엉터리인가.
KBC의 김기윤 국제부장은 『외국복서들은 그 나라 랭킹 5위 이내에 들어야 우리나라에서 경기를 벌일 수 있다. 따라서 KBC는 이 기준에 의해 심사하고 있으므로 선수선별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고있다.
또 전호연 프러모터(극동프러모션)는 『한국 복서들이 동양권에선 너무 강해 상대를 구할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K프러모터는 『국내에서도 유망주들은 해외원정을 꺼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태국·필리핀·일본 등도 장래성 있는 복서들을 한국에 보낼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고 실상을 솔직이 밝히고있다.
권투계에선 이 같은 날림경기의 남발은 국내 프러모터의 영세성과 TV의 마구잡이 중계에 책임이 있다는 중론이다. 2월 현재 국내엔 67명의 매니저가 1천 2백 28명의 복서(10회전 이상의 A급 1백명, 8회전 이상의 B급 1백 2명, C급 1천 26명)를 거느리고 있다. 또 매니저가 겸하고 있는 프러모터가 17명인데 이들은 한결같이 TV중계에 의존하고있다.
21일 부산에서 황충재(OPBF 웰터급 챔피언)의 13차 방어전을 개최한 극동 프러모션(회장 전호연)의 경우를 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주최측의 경비내용은 황의 대전료 5백만원(매니저 몫 1백 50만원 포함), 도전자인 필리핀의 「구즈만」 대전료 1천 5백 달러(약 1백 5만원), 트레이너 등 3명의 체재비(1천 달러)와 왕복 항공료(2천 5백 달러) 등 약 2백 50만원, 필리핀 저지의 심판비 2백 달러(약 14만원), 그리고 OPBF에 지불하는 타이틀 인정료 14만 4천원 등 지출비용이 대략 8백 83만원에 이른다. 물론 여기에 세금 1백여 만원을 나중에 또 지불해야하기 때문에 1천여 만원의 비용이 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입액의 내용은 KBS로부터 1천 1백 만원의 중계료와 2백여 만원의 입장수입이 전부이므로 결국 주최측은 3백여 만원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그렇지만 주최측은 타이틀전 교섭과정에서의 경비 및 트레이너비 등 기타지출을 감안하면 남는 것이 없다는 얘기다. 전호연 매니저는 『복서와 방송국 측만 돈을 버는 셈이다』고 푸념한다. 챔피언 황은 매니저 몫을 빼고 3백 50만원을 벌었으며, KBS측은 4개의 스폰서(개당 약 5백만원)로부터 모두 2천여 만원을 받아 중계료를 제외하고 9백여 만원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인기복서 황충재의 경우는 중계료가 많아 흑자를 기록하지만 논타이틀전의 국제경기를 주최할 때에는 적자를 면키 어렵다. 벌금소동을 일으킨 이승순-「조커」의 대전을 주최한 김현치 매니저는 최소한 1백여 만원의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한국은 현재 OPBF 12개 체급 중 11개 체급의 타이틀을 석권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11명의 챔피언 중 박종팔(미들급) 황충재 김상현(주니어 웰터급) 등 3명의 인기복서만 5백여 만원의 대전료를 받을 뿐 나머지 챔피언들은 3백여 만원의 대전료를 받아 겨우 생활한다. 따라서 한국 프로복서 1천 2백여명 중 복싱으로 생활할 수 있는 선수는 1%에 해당되는 10여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프러모터들은 TV중계에 맞추기 위해, 또 이 같은 적자를 면키 위해 대전료가 적게 들기만 하면 마구잡이로 외국복서들을 초청하게 되는 것이다. KBC는 이 같은 무질서와 저질의 복싱을 지양하기 위해 미국과 중남미 세계랭커들의 초청을 종용하고있다.
그러나 프러모터들은 동남아 복서들을 불러들일 때보다 최소한 5천 달러(약 3백 50만원)의 경비가 더 든다는 이유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TV의 권투중계는 KO승이 속출하고 있는데 팬들은 계속 어린애 팔목 비틀 듯 저질북서들을 때려 누이는 한국복서들의 KO행진을 즐겨야만 하는가. <이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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