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4)<화맥인맥-제76화>쌓이는 반목|월전 장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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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반도호텔에서 열린 미술인 총회는 화해는 커녕 갑논을박으로 대한미협과 한국미술가협회의 두 번째 교전장이 되었다.
한국미술가협회는 회의성격도 몰랐을 뿐 아니라 꼭 나와야 한다는 문교부의 으름장 때문에 대표 몇 사람이라도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의장인 반도호텔 정문 오른쪽에 있는 큰 홀은 꽤나 요란스러웠다.
춘곡(고희동)·설초(이종우)·청구(이마동)·도천(도상봉)등 대한미협의 간부들이 의자에 턱 버티고 앉아있고, 표양문 의원은 문 앞에서 설치고 다녔다.
우리일행은 안내를 받아 뒤쪽에 가 앉아 대한미협의 거동부터 살폈다.
가만히 보니 대한미협 측에선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다 참석, 숫적으로도 한국미술가협회를 압도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 우리도 사람을 시켜 인력동원을 해야만 했다.
부랴부랴 서둘러 몇 군데 연락, 여남은 회원이 더 왔다.
대한미협을 후원하는 이존화·표양문·손문경씨 등 여당의원은 빠짐없이 나와있는데 한국미협을 도와주는 야당의원은 한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회의가 시작되자 표양문 의원이 등단, 핏대를 올리면서 화목을 강조하는 일장 훈시를 했다.
이 때서야 윤제술 의원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다음엔 윤효중씨가 나가서 단일 미협을 만들자고 제안,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거수로 표결하자』 『안 된다』고 옥신각신하는데, 이번에는 이존화 의원이 일어나 대한미협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그 때까지 잠자코 앉아있던 윤제술씨가 벌떡 일어나 『국회의원이 무슨 할 일이 없어 미술단체 싸움에 끼어 드느냐』고 쏘아 붙였다.
장내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윤제술씨는 이어 『미술단체의 일은 미술가들에게 말기고, 국회의원은 가서 국사나 보라』면서 휭 하니 나가버렸다.
윤씨의 일침에 여당국회의원들은 어쩔 줄 몰랐다. 심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대한미협 측에선 여당의원들이 퇴장할세라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표결 기습공작을 시도했다.
숫적으로 열세인 한국미술가협회 회원들도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누군가가 『갑시다』하고 선동하는 바람에 모두 나와버렸다.
문교부는 화해회의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자 막후 접촉을 통해 대한미협 측에서 심사위원 3명을 추가토록 하여 국전보이코트를 매듭지었다.
결국 제5회 국전은 예년에 비해 한 달이나 늦게(11월 1O일) 열려 20일간 계속되었다.
국전이 열리자 이번에는 한국미술가협회 측에서 서세옥 김세중 등 회원 10여 명이 출품을 거부, 당국이 대한미협에 굴복한 일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 해는 공교롭게도 심사과정에서 티격태격하는 불미스런 일도 일어났다.
동양화 분과에서 소정(변관식)과 심산(여도현)이 한바탕 다투었다.
오전 심사를 마치고 국전 주관처인 문교부가 점심을 내는 자리(고려정)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심사중의 의견대립과 평상시의 불목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당시 동양화부 심사위원은 춘곡·청전(이상범)·제당(배렴)·심산·월전(장우성)·소정·정재(최우석)·의재(허백련)·이당(김은호) 등 9명이었다.
점심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여담을 하다가 몇 마디 큰소리가 오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 냉면을 담았던 빈 대접이 획 날아갔다.
냉면 그릇을 던진 사람은 소정, 맞은 사람은 심산이다. 성격이 팔팔한 소정이 오전심사과정에서 심산과 다툰 일이 마음에 맺혔던지 분을 터뜨렸다.
심산은 놋대접에 맞아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 것을 손수건으로 누르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이 꼴을 보고 있던 다른 심사위원들이 소정을 향해 『점잖지 않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핀잔을 주고는 차를 불러 심산을 태우고 김성진 외과에 가서 다섯 바늘이나 꿰맸다.
이 사건의 근인은 심사과정에서의 의견대립이지만, 속인은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초기 국전에서 소외당한 이당과 소정이 그 당시 국전중심세력이던 심산·청전·제당과 반목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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