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굴든」의 신간 『한국전?화』|미군 『도망병 부대』|총 소리만 들려도 연?병력 모두 도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950년 6월과 7윌 사이에 한국전선에 긴급투입된 미군은 모두가『용감무쌍한 정예부대』였던 것은 아니었다. 훈련도 제대로 안된 신병들이 있었는가하면 생사의 절박한 기로에서도 뿌리깊은 흑백인종차별이 있었다. 북괴인민군의 총소리만 들어도 혼비백산 도망치는 미군장병도 많았다.
지휘관의 진격명령에 따르지않은 어떤 장교는 나중에 군법회의에 넘겨져 명령불복종죄로사형을 선고받았다가 20년간 중노동형으로 감형된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에서 군인으로서는 영원히 씻지 못할 치욕적인 『도망병 부대』라는 오명을 얻은 부대는 미 육군 제25보병사단 예하의 제24연대였다.
일명 검둥이 부대라고도하는 제24연대는 연대장병 전원이 흑인으로만 구성된 미 육군의 이색부대였다.
제24흑인연대는 원래 1870년대와 1880년대를 통해 아메리컨 인디언의 토벌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정예부대였다. 당시만해도 미국 남부지방의 노예였던 검둥이들이 대접을 받던 때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의회는 흑인병사들의 전공을 찬양하여 1878년 흑인연대를 창설하는 특별결의안을 채택했다.
비록 흑인연대가 전투에 강한 부대였어도 미군내에 팽배해있던 흑인차별의 벽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백인장병들은 흑인연대의 전공을 비웃고, 그들을 『2류병사』쯤으로 생각했다. 흑인연대는 고작 지원부대에 불과했다. 검둥이 연대의 장병들은 인간 취급도 안 해주는 백인들을 위해 총알받이가 돼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며 사기는 극도로 떨어졌다. 흑인연대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은 것은 한국전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25보병사단이 한국전선에서 첫 전투에 참가한 것은 50년7월20일이었다. 사단장 「월리엄·킨」소장은 제24 흑인연대에게 경북 예천지역을 방어하라는 첫 작전명령을 내렸다.
당시의 전황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유엔군은 낙동강 교두보에서 북괴군과 대치했는데 부산과 대구지방의 생명선인 낙동강 전선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워커」장군은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 1학년때 배운 전투교본에 따라 낙동강을 배수진으로하지 않고 전방 방어선으로 하여 북괴군을 저지할 작전을 세웠다.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고지구릉에 참호를 구축하고 낮 동안에는 우세한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민군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고, 야간에는 정찰조를 전진시켜 적의 동태를 감시하도록 했다. 6명씩으로 구성된 정찰조는 우세한 적과 조우하면 재빨리 원대복귀하고, 무차별 야간포격을 가했다.
「워커」사령관의 작전은 부산지방의 통로인 낙동강 교두보를 절대로 열어주지 않고 북괴군의 주력부대를 붙잡아 둠으로써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구지방의 사수는 지상명령이었다.
「워커 사령관은 대구지방의 방어를 제5보병사단에 명령했다. 사단장 「킨」소장은 1919년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2차대전 중 「오마·브래들리」장군의 참모를 역임했다.
그러나 일선 사단장으로서 최전선부대를 지휘하기는 이번이 저음이었다. 「킨」사단장은 대구에서 낙동강을 따라 72km떨어진 상주에 지휘사령부를 설치하고 7월20일 예하 제24흑인연대 (연대장 「호튼·화이트」대령)에 예천방어를 명령했다. 그러나 흑인연대는 전선에 투입된 바로 첫날부터 뒤죽박죽이었다.
투개시 1∼2시간도 지나지않아 전열은 흩어지고 허둥지둥 도망치고 말았다. 흑인연대 장교들은 엄청나게 우세한 북괴인민군과 조우해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음날 정찰부대는 미군의 포격으로 물타버린 예천읍내에서 인민군 대병력이 있었다는 아무런 층거를 찾지 못했다. 24연대의 측면에서 작전한 제35연대의 지휘관도 그 같은 정보는 없었다고 층언했다.
그날 제24흑인연대의 제2대대는 산길을 따라 전진하고 있었다. 갑자기 도로전방에서 박격포와 자동화기의 공격을 받은 제2대대는 그길로 되돌아 도망치고 말았다. 당시 제2대대를 안내하던 한국군 장교들은 도로가 차단됐으니 산개하여 우회전진하자고 제의했으나 미군대대장은 알아듣지 못했다. 미군들은 매우 『무질서한 방법』으로 퇴각했고, 대대장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면서 달아 났다. 다음날 한국군 부대가 도로봉쇄지점을 기습, 경기관총 2정, 박격포 1문, 그리고 북괴패잔병 30명을 체포했다. 결국 흑인장병들은 총 한방 제대로 쏴보지 못하고 도망친 꼴이었다.
제 3대대는 퇴각할때 기관총 15정·박격포 8문·로키트포 4문, 그리고 소총 1백2정을 버리고 도망친 일도 있었다. 또 L중대의 경우, 장교 4명과 사병 1백5명이 전선에 투입됐는데 하루뒤에 참호에 남아있었던 병력은 전사 장교1명과 사병 17명뿐 이었다. 나머지 장교 3명과 사병 88명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중 장교 1명과 사범 35명은 후방에서 나타났다고 미 육군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제24흑인연대 장병들은 낮이면 전선을 지키고 있다가 밤만 되면 도망치곤 했다.
장교들은 하는 수 없이 전선의 후방에 지켜서 있다가 도망치는 사병을 잡아들였다. 검문초소를 지켜선 연대인사장교 「존·울리지」소령은 상주를 떠나는 모든 차량을 검색하여 하루평균 75명을 잡았고, 어느 날은 1백50명을 잡은 적도 있었다.
7월30일 사단장 「킨」소장은 24흑인연대의 후방에 35연대를 배치해 독전했다.
그러나 북괴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24연대의 전방중대장 「리언·길버트」중위가 도망하기 시각하자 그뒤를 사병 15명이 따랐다.
연대장 「화이트」대령이 전선복귀를 명령했으나 「길버트」중위는 겁이 난다며 명령에따르지 앉았다.
「길버트」중위는 전투명령 불복종죄로 군재에서 사형이 선괴됐으나 감형되어 20년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