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1)<제76화>화맥인맥(60)|미술계 두동강|월전 장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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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55년 5월 대한미협은 정기총회를 열었다. 회장선거를 둘러싸고 양파전이 벌어졌다.
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미술가협회」를 만들어 이끌어온 춘곡(고희동)과 서울대미술대학의 산파로 학장직을 맡은 우석(장발)이 위원장자리를 놓고 일전을 겨뤘다.
선거를 치르면서 지금까지 대한미협과 국전을 주도해온 춘곡과 도천(도상봉)을 정점으로 한 「중도파」가 이른바 「홍대파」와 밀착, 춘곡의 재선을 꾀했다.
투표결과 춘곡이 이겼지만 정관상으로 만족한 득표가 아니었다. 과반수가 되려면 1표가 더 있어야한다고 이른바 「서울대파」의 우석 참모들이 클레임을 걸었다.
이 문제 때문에 심야회의를 열어 회칙해석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춘곡의 1등 참모 불재(윤효중)가 이튿날 아침 신문에 「대한미협 위원장에 고희동 당선」이라고 발표, 기정사실화 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국전운영에 불만을 표시해온 서울대파는 미술의 새로운 방향모색이란 이념을 내세워 독립을 선언했다.
1955년 5월21일 창립총회를 열고 발족한 한국미술가협회의 회원은 서세옥 송병돈 이세득 김훈 노수현 박득순 장욱진 이규상 권옥연 김형구 문학진 신홍휴 김창억 배염 김병기 장운상 박세원 권영우 장우성 김종영 김세중 백문기 장기은 유한원 이순석 유형필 정창섭 김정환 한홍택 이봉원 김진갑 백태원 손재형 장발 김충현 배길기 이기우 임응식 최창희 지부원 임윤창 이희태 김정수 김태식 이현옥 김한용 이건중 이윤승 정환섭 최중길 김응현 백양흠 한동섭 백태호 조정호 남용우 김연수 차량호 박철준 김영학 박여옥 안기풍 이경모 이병삼 안월산 허종배 외 52명 모두 1백18명이었다.
한국미협은 5월25일자로 신문에 공고를 내고 본회회원은 국내 타 종합미술단체와 일체의 관련을 단절한다고 발표했다. 또 한국미술가협회의 명칭은 어떠한 경우도 약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못박았다.
이 같은 조처가 바로 대한미협을 의식하고 이루어진 것이다.
요컨대 전에 대한미협에 가담했던 사람일지라도 대한미협과의 관계를 5월21일 이전 일로 돌리고 21일부터는 모든 관계를 뚝 끊겠다는 결의였다.
뿐만 아니라 호칭마저 대한미협과의 혼돈을 막기 위해 한국미협이란 약칭을 피하고 한국미술가협회로 쓰도록 한 것이다.
이일로 해서 미술계는 완전 두동강이 났다.
이때 동양화·서양화·조각·공예는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으로 이념과 이해에 따라 둘로 갈라섰지만 서예만은 고스란히 한국미협에 가담했다.
그 까닭은 대한미협에서 소전(손재형)을 견제하기 위해 서예부를 없앴기 때문이다.
한국미협은 창립 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우선 전시회 계획부터 세웠다.
국전을 열던 경복궁 전람회장을 빌리기 위해 사용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러니 대한미협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였다. 음으로 양으로 압력을 넣었다. 심지어는 한국미협회장 장면씨가 야당 핵심 멤버인 장면씨의 실제라고 단체마저 야당으로 몰아세웠다.
적법절차를 밟아 전시장 사용신청서를 냈건만 가타부타 말이 없이 차일피일했다. 나는 그때 동양화부 대표위원직을 맡고있어 사무실이 있는 창덕궁으로 담당자인 윤자경씨를 찾아갔다.
『우리도 한국의 미술진흥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무슨 이유로 장소를 빌려주지 않느냐』고 따졌다.
안 되는 이유를 대라고 다그쳤다.
윤씨는 『나는 할대로 했지만 서류가 경무대에서 퇴짜 맞았다』고 실토했다.
어느새 대한미협이 경무대까지 움직였구나 생각하고 하는 수 없이 휘문고보 강당을 빌었다.
강당에 칸막이를 해서 전시회를 열었다. 회원들이 대동단결해서 좋은 작품을 내줘 전시장은 초라했지만 그림 평은 좋았다.
항간에서 대한미협은 「홍대파」로, 한국미협은 「서울대파」로 지칭한 것은 대한미협의 핵심멤버인 윤효중씨가 홍대에 있었고, 한국미협회장 장면씨가 서울대 미술대학 책임자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지 학생들간의 반목으로 생긴 대명사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윤효중·장면씨의 심한 갈등과 이념대결이 두 대학 교수와 제자들마저 양파로 갈라놓는 대립의 양상을 보였을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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