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가장 길었던 사흘(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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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5·16출동부대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군단장 김웅수 소장과 그 예하 사단장 정강 준장이었다. 서울의 비상사태에도 대비하는 이 사단은 군단장의 출동명령을 촉구하고 있었다. 육본의 군사혁명위원회가 입수한 정보는 정강 준장의 병력, 그리고 박영준 준장의 ×사단 출동이었다.
여기에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미 기갑사단의 측면지원도 있다는 정보였다. 야전군 휘하의 이들 진압군의 출동예정시간은 18일 새벽4시. 그것은 출동부대인 포병단의 원대복귀 실현과 때를 맞추고 있었다. 혁명위원회에 있어 17일은 가장 중요한 고비였다.
혁명위원회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야전군내의 지원군 진입」「진압출동을 위해 비상 대기령을 내린 지휘관의 체포」「군부지지의 확대」, 그리고 유엔군 사령부에 대한 정치공세였다.

<박림항 중장 주저>
박정희 소장은 거사전 협조를 약속한 군단장 박림항 중장에게 예하의 채명신 사단을 지원군으로 보내주도록 계속 독촉했다. 그러나 박 중장은 지원출동을 주저했다. 박 중장은『국방대학원의 커리큘럼「군은 강력해야한다. 그러나 전지전능해서는 안 된다. 군은 영향력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군인으로서의 나의 신조이기도해 출동령을 내릴 수 없었다』고 했다.
혁명위가 시도한 또 하나는 해·공군 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의 지지성명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혁명위는 17일 하오3시 육본에서 세 번째로 3군 총장회의를 열었다. 박정희 소장은 이 회의에 나가『3군 지휘관의 공개적인 지지결정이 늦어져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지지성명을 직접 녹음 방송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이 자리에서 태도를 결정해 성명을 발표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출동부대의 중견장교들이 회의장을 둘러싸고 있었다.『출동부대의 한사람으로서 묻겠습니다. 도대체 지지하는 것입니까, 반대한다는 것입니까』고 대들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장도영 총장이『여기 모인 3군 총장 모두가「지지한다」고 이미 말했었다』 는 말로 중견장교들을 달랬다.『그렇다면 녹음해달라』고 K 중령이 말했다. 그런데 녹음기가 없었다.
중견장교들이 녹음기를 가지러간 사이 3군 총장들은 한사람씩 자리를 빠져나가 버렸다. 결국 혁명위는 녹음에도 실패하고 서명도 받지 못한 채 3군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해·공군 총장 등은 유엔군사령부와 야전군의 동향 때문에 지지성명을 낼 수 없었다. 이성호 해군총장은 반대의사가 뚜렷한 듯 했다.
거기에다 김성은 해병대 사령관은 이 회의에 참석하기 전 체포될 뻔한 사건까지 겪었다. 김성은 사령관의 회고.『17일 상오10시쯤이었어요. 사령관 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해병대 무장군인 40여명을 태운 트럭이 부대로 들어옵디다. 직감적으로 어떤 사태를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지요. 약 30분쯤 지나 부사령관 고길동 소장이 들어오더니 <30분전에 해병여단의 혁명군들이 사령관님을 체포하러 왔었습니다>라고 보고를 하더군요.
그러면서 사령부 참모들이 이들을 막아서서 <혁명도 좋지만 부하장병이 사령관을 체포하는 것은 해병대 전통에 먹칠을 하는 짓이다>라고 설득해 돌려보냈다고 하더군요. 그 당시 해병대의 출동부대 지휘관은 김동하 예비역 소장과 김윤근 준장이었는데 그 날까지 한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어요.』
육본의 군사혁명위원회가 승패를 걸고 모험한 주사위던지기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중장 체포작전이다.
야전군내의 주체인 조창대 이종근 심이섭 엄병길 중령 등이 체포작전을 지시 받은 것은 17일. 이들은 16일 이래 사령부내 포섭활동에 나서 중요 참모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체포는 16일 이래 줄곧 구상해 왔지만 실행은 몹시 힘든 상황이었다. 밤10시 포병 참모실에서 회의를 열었지만 헌병참모 박태원, 포병참모 정봉욱, 심리전참모 허순오 대령 등은 하루만 더 기다리자는 태도였다. 그러나 한밤중이 되자 독촉은 성화같았다. 결국 새벽6시 작전을 결행키로 했다. 경비헌병 전원을 몰래 철수시킨 뒤 12문의 고사포와 2개중대의 병력으로 사령관 숙소를 포위한「체포작전」이었다. 그 과정을 관계자의 증언으로 엮는다.
이종근씨(당시 중령·전 국회의원).『밤10시 회의에서 결정을 못보고 나왔는데 군단 쪽 동지들이 <체포가 늦어지면 우리가 모두 당하게 된다>는 급보가 쏟아졌어요. 그래서 조 중령은 포병참모 정 대령을 만나 고사포 중대 동원을 승낙 받고 나는 정 대령의 소개로 동조하게 된 ×사단 포병사령관 벽창호 대령을 찾아가 병력지원을 요청했는데 태도가 바뀌어 <사단장 승낙을 얻어야겠다>며 전화를 들잖아요. 마침 심 대령이 교환대를 폐쇄시켰기 망정이지….』
허순오씨(당시 대령·심리전참모·전 전기안전공사 이사장).
『18일 새벽6시를 결행시간으로 정했어요. 포병참모 정 대령이 고사포12문을 사령부 요소 요소에 배치하고 나는 선전중대 2개 소대를 완전 무장시켜 통근차로 가장하여 사령관 숙소를 포위한다는 계획을 세웠지요. 포병사령관의 지원을 못 얻어 고사포로 포위하고 포병부대라고 했어요.』
헌병참모 박태원씨의 증언.
『18일 새벽6시쯤으로 기억됩니다. 조창대 중령이 헐레벌떡 내 숙소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짜고짜로 <형님! 큰일났습니다. 같은 사령부 병력간에 피를 흘리게 됐습니다. 헌병을 철수시켜 주십시오>하며 엄살을 떨더군요. 5·l6이후 나는 사령관 숙소에 1백여 명의 헌병을 무장시켜 경계를 시켰습니다. 나 또한 혁명에는 동조하고 있었지만 사령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조 중령 무슨 소리야>하고 물었더니 그는 <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포병l개 대대가 사령관숙소를 완전포위 했습니다. 헌병과 충돌이 일어날는지 모릅니다. 피를 흘리지 않게 조치해 주십시오>하더군요. 그래서 <사령관 체포는 누구의 지시인가>고 물었더니 혁명위원회의 박 소장 지시라는 거예요. 새벽4시에 오치성 대령이 <박 소강의 지시다>라면서 독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누가 숙소로 들어갈 것인가>했더니 엄병길 중령, 박용기 중령, 안찬희 대위가 간다고 합디다. 그들에게 헌병완장과 헬밋을 내주고 헌병장교로 위장시켰죠. 그리고 조 중령에게 한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헌병복장으로 위장>

<만약 호송도중 사령관에게 손이라도 까딱하면 호송장교일행을 그 자리에서 사살해버린다>고 말예요. 그리고 사령관숙소에 나가있는 헌병중대장에게 철수명령을 내리면서 사령관을 서울로 모셔가기로 했다고 알리고 <정중히 서울까지 모셔야한다>고 했지요.
나중에 알았지만 포병부대는 새벽6시가 지나서야 숙소주변에 배치되었는데 조 중령이 마치 배치된 것처럼 공갈을 친거더군요.』
박용기 중령의 회고.
『우리 3명은 헌병중위 복장으로 가장하고 헌병참모부 P-2호 차를 타고 이 장군 숙소로 달렸습니다. 아침6시40분쯤이었죠. 그 때는 이미 야전군사령부 연병장에는 12문의 고사포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허순오 대령이 인솔하는 80여명의 선전중대 병력들이 사령관 숙소외곽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사령관은 참모장 황헌친 준장, 군수참모 박원근 준장 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들은 이날 아침 혁명위원회로부터 <군사령관을 박림항 장군으로 교체한다>는 연락을 받고 대책을 숙의 중이었습니다. 이날 새벽3시 장 총장이 참모장 황헌친 준장에게 이 같은 지시를 내리고 <인수인계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이 장군의 태도는 <진시황제>라는 그의 별명처럼 당당했습니다.
그는 <박정희가 날 잡아오라고 시키더냐>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권총에 실탄을 뺄 것을 요구하자 <군인이 무장해제를 당하면 생명을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럼 탄창 만이라도 주십시오>하고 요구했더니 옆에 있던 박 준장이 <각하, 그림 제가 탄창만 빼고 권총은 그대로 드리겠습니다>고 설득하고 권총만 차게 했습니다.
사령관을 태운 차가 사령부정문을 막 벗어나는 순간 군사령부 미 고문단장「재브로스키」 준장을 태운 차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4km나 우리 일행을 따라오기에 중간에서 차를 멈추고 이 중장과 만나게 했습니다. 그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릅니다.
서울까지 오면서 우리는 군부대가 있는 지역을 피하기 위해 코스를 우회했습니다. 압송도중 하늘에는 헬기가 줄곧 따라왔습니다.
현병 1개 분대(9명)를 태운 지프가 에스코트했습니다. 엄 중령이 운전하는 뒤차에는 이 사령관·부관, 그리고 안찬희 대위가 탔습니다.
아침 10시쯤 서울 덕수궁 앞에 도착, 공수단의 차지철 대위에게 사령관을 인계했죠. 이때 박 소장과 김종필씨가 함께 대한문 앞에 서있었는데 이 사령관을 태운 차가 도착하자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거렸습니다.』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의 회고.
『18일 상오 이 사령관을 호송해오던 야전군동지들이 미군비행기가 저공으로 선회하며 위협을 하고 있는데 자칫하면 탈취 당할 위험이 있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중간지점인 ××까지 공수단 병력을 보내 엄호했어요.』
이한림씨의 회고.
『5월18일 아침7시쯤 내 숙소에서 참모장 황헌친 준장. 군수참모 박원근 준장과 아침식사를 하는데 헌병완장을 두른 3명의 장교가 무장을 하고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사령관님! 숙소는 완전히 포위돼 있습니다. 순순히 가셔야겠습니다>며 협박했습니다.
내가 물었죠.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서울 혁명위원회본부로 가셔야겠습니다.><비행기로 가자.><안됩니다. 차로 가셔야겠습니다.> 당시의 심정은 담담했습니다. 권총을 차고 일어서는데 그중 한 명이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때는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왜 쏘지 않느냐">

<이놈들아! 적장의 투항을 받을 때도 예우는 갖추는 법이다. 하물며 내부하인 너희들이 감히 그럴 수가…. 야전군사령부마크를 단 장교는 나를 체포할 수 없다>고 호령을 쳤더니 태도가 공손해집디다.
부관l명과 함께 지프를 탔습니다. 헌병l개 분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서울로 향했죠.「재브로스키」고문관이 약4km나 따라오다 그냥 돌아갔습니다. 10시쯤 서울에 도착했죠.
덕수궁에 도착하자 혁명군 장교들이 우루루 몰려들더니 무장을 해제시켰습니다. 그리곤 중화전 계단에 세워놓고 사살이라도 할 듯 권총을 겨누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당당히 버티고 섰죠. <쏴라! 왜 쏘지 않느냐.>
이 때 장교1명이 달려오더니 <몰라 뵈서 실수를 했습니다. 중화전 안으로 들어가십시오>하며 공손하게 안내하는 것이 아닙니까. 후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박 소장의 지시였습니다. 박 소장은 이날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 사열을 받기 위해 덕수궁 문 앞에 나와있었고 내가 연행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화전에서 한나절을 보냈어요. 내가 사령부에서 나올 때 들고 나온 것은 묵주하나 뿐이었어요. 묵주를 세면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오4시쯤 헌병사령부로 압송됐죠. 배가 고팠습니다. <아침도 못 먹고 잠도 잤다. 국밥 한 그릇만 사오너라>고 해 요기를 했습니다. 그 후 재판도 받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8·15특사로 풀려났습니다.』
◇부기=연재23회의 장 총장에 청탁을 했다는 박병배씨 증언에 대해 이철승·이필선씨는 <장 총장의 총장임명에 반대해 그런 일을 할 입장이 아니었고 이필선씨는 그의 재임기간 중 1회밖에 만난 일이 없다>고 알려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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