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CIA·국무성 극비문서에 나타난 미국의「중동공작」<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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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76년2월에 작성한『이란의 지배계층과 세력분포』란 보고서 (비밀문서 제7책 63페이지부터 수록)는「팔레비」국왕의 권력구조와 정책결정과정, 그리고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소수의 실권자들의 면모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본사가 테헤란에서 입수한 1백50페이지 짜리 CIA보고서는「팔레비」왕권의 핵으로 15인 그룹을 거명하면서「팔레비」의 통치형태를 분석하고 있다.「팔레비」를 정점으로 한 15인 핵 그룹은 국왕개인에 대한 절대적·맹목적 충성심을 바탕으로 3천8백만 이란 국민 위에 군림했었다.

<충실한 눈·귀 역할>
「팔레비」와의 개인적인 친분과 신임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이들 소수의 지배층은 국민들을 왕명에 절대복종 하도록 만들었다. 전제군주국가 이란에서는 왕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941년 21세의 나이로 즉위한「팔레비」자신이『이란 국민은 국왕을 모욕하는 것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모든『이란국민은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공언했었다. 이란국민에게는 국왕이 곧 국가였던 것이다.
「극비」로 분류된 CIA보고서에 따르면 이란의 국민은 △지배층 △중간층 △하류층 등 3개 계층으로 분류된다.
지배층은「팔레비」국왕, 왕족, 부족장, 대지주, 회교의 최고지도자, 이란군장성이 포함된다. 전통적인 중간계층은 일반관료, 회교성직자, 상인, 사업가들이며 하부구조로 농민, 노동자, 유목부족원 등이 있다. 왕권을 수호하고 국민을 지배하는 권력구조의 근간은 △국가안전정보기구(사바크) △이란군 △내각 △집권 회교공화당 등이다. 비밀경찰 사바크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EBI)및 국가안보회의(NSC)의 기능을 합친 것에 해당되는 막강한 기구다. 비밀경찰 사바크는「팔레비」국왕의 눈이자 귀였다. 사바크의 장은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왕의 심복이다.
사바크는 관료와 일반국민의 동태를 감시하며 언론과 정부의 홍보활동을 통제하고 국왕의 신변보호를 맡는다.「팔레비」국왕은 이란군의 통수권 자로서 군대의 이동·작전·군장성의연사·군사정책을 직접 결정한다. 이란 군은 왕권의 보위를 맡고있다.
이란의 내각은 정책결정 기구라기보다는 왕명을 받들어 국왕의 정책을 시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상직은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인물에게 돌아가므로 수상은 내각회의에서 국사를 의논하여 국왕의 결재를 받기 위해 정책 안을 추천하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정당의 기능은 일반국민의 의사를 수렴하는 역할보다는 왕실의 시책을 국민에게 전달하는 통로 노릇을 할 뿐이다. 이밖에 국가경제 문제를 다루는 경제위원회가 수상실 밑에 있으며 국가예산 낭비와 공무원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감사위원회가 있다.
「팔레비」1인 통치체제 하에서 백색혁명을 통한 현대화계획을 추진하는 데에는 유능한 인재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인재는 국왕과 왕제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 고위직에 발탁될 수 있었다.
CIA보고서는「팔레비」국왕 측근에서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고위직 인사 15명을 영향력행사정도 순으로 꼽고 있다. 그들은 모두「팔레비」의 황태자 시절부터 두터운 친분을 가졌거나 1953년「모사데크」수상에 반대하여「팔레비」를 끝까지 지지했거나 투철한 반공주의자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상 세밀히 파악>
CIA보고서가 분석한 15인 핵 그룹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①「아사돌라·알람」-궁내성 장관
②「네마톨라·낫시리」-비밀경찰 사바크의 장
③「오베이시」장군-이란군 장성으로 요직역임
④「호베이다」-수상
⑤「투판판」장군-이란군의 군수책임자
⑥「파르두스트」장군-왕실특수정보책임자
⑦「아자리」장군-이란군 합참의장
⑧「모이니안」-「팔레비」왕의 비서실장
⑨「아무제가르」-외상·수상
⑩「후샹」-경제상
⑪「아크바르」-원로정치인
⑫「샤리프·에마미」-상원의장
⑬「파라」왕비-「팔레비」의 왕비
⑭「아슈라프」공주-「팔레비」의 쌍둥이 누이
⑮「자헤디」장군-주미대사
미CIA가 이들 15인 핵 그룹의 개개인의 신상명세를 얼마나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지를 몇 가지 예로 살펴보자.
『「아사돌라·알람」궁내성 장관은 66년 이후 현직에 있음.「알람」은 33∼36년「팔레비」와 함께 스위스에 유학했다. 그는 45년에「팔레비」의 특별임무를 부여받았으며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팔레비」에 대한 변함 없는 충성심을 보였다. 50년 왕실재산의 관리책임자가 되었으나 그 뒤「모사데크」수상에 의해 해임되었다.
해임이유는 국왕의 권위를 저해하려는 수상의 조치에 반대했기 때문임.「알람」은 내상(55∼57년)과 수상(62∼64년)을 역임했으며「팔레비」국왕은 57년「알람」에게「국왕에 충성스러운 야당」인 국민당을 이끌게 했음.「알람」은 61년에「팔레비」재단의 초대이사장에 취임했음. 그는 국정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에까지도「팔레비」에게 조언하고 있다. 그는 매일 30∼45분간씩「팔레비」와 단독으로 만나고 있다. 현재「알람」의 건강이 좋지 않아 「팔레비」는 그를 위해 유명한 의사를 초빙토록 명령했음.』
CIA의 개인신상명세보고서는 인명사전보다도 훨씬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비밀경찰 사바크를 이끌었던「네마톨라·낫시리」에 관한 기록을 보면-.
『국가안전정보기구 사바크의 장인「낫시리」는 수시로「팔레비」에게 접근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낫시리」는「팔레비」국왕과 육군사관학교의 한 반 친구였다.
그는 반「모사데크」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낫시리」는 1953년8월16일「모사데크」 수상을 해임하는「팔레비」국왕의 명령을 직접 전달했으나 수상은 어명을 무시하고 그를 체포했다.

<반대파 가혹 처단>
「팔레비」국왕이 이탈리아로 일시 망명했다가 귀국했을때「낫시리」는「모사데크」수상을 체포했었다.「낫시리」는 5년 간 경찰책임자로 봉사한 뒤 65년부터 사바크를 맡았다. 그는 또 왕실근위병사령관(57∼60년)을 지냈다.「낫시리」는 왕실안보문제에는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인물이어서 반대파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단을 한다. 그는 은퇴하여 유럽의 별장에서 살기를 희망하지만「팔레비」가 만류하고 있다.』(비밀문서 제7책 116페이지)「팔레비」 국왕을 둘러싼 15인의 권력자들은 국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서로 치열한 암투도 서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호베이다」수상과「자헤디」주미대사와의 관계다.
「호베이다」가 65년 초 수상에 취임 했을때「자헤디」는「호베이다」밑에서는 테헤란에서 공직을 맡을 수 없다고 선언했을 정도였다.
이들 15명 가운데는 군장성출신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왕족으로서는「파라」왕비와 「아슈라프」공주 등 여성이 끼여있으나 왕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팔레비」국왕의 형제가 모두 11명이나 되지만 대부분 어머니가 다른데다「팔레비」친모가「팔레비」보다는 차남인「알리」왕자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팔레비」앞에서는 다른 왕자들의 정치활동이 크게 제약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족들은 정치보다는 체육·적십자활동 등 사회활동에 더 깊이 관여했다.
15인 그룹은 대부분「팔레비」국왕과 10년 이상의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한번 직책을 맡으면 장기간 종사한 것이 특징이다.
15인 이외에「팔레비」의 측근에 있었던 인물 몇 명은 정치문제에는 관련이 없었으나 개인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팔레비」의 주치의「아야디」박사는「팔레비」 의 자금지원으로 남부이란에 수산물회사를 설립했다. 국왕은 퇴역장군을 이 회사의 사장에 임명했는데 이 회사는 부정부패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졌다.「아야디」는「팔레비」가 두 번째 왕비인「소라야」와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떠날 때 수행했었다.「아야디」는 회교가 이단시하는 바하이 교도여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
회교지도자「하산·에마미」도「팔레비」의 측근인사로 꼽힌다. 테헤란의 이슬람사원의 책임자인 그는 왕실의 종교행사를 주재했다. 그는「팔레비」와 프랑스말로 대화를 하는 사이였다.
이들 국왕의 심복들은 이슬람혁명이 한창일 때 해외로 도피했다가 대부분이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에서 가지고 있는 재산도 각자 수억 달러에 이르고 있다는 소문이다.
「팔레비」직계가족은 로스앤젤레스근교에 1천 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5백50만 달러(38억5천만 원)에 구입한 것이 비밀문서 속에 기술돼있다. 12년 간에 걸쳐 수상직을 맡은「호베이다」는 부패의 상징으로 국왕이 체포하여 국민에게 시범을 보이려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호베이다」는 구속 중이어서 해외로 도피하지 못하고 혁명 후 처형되었다. 이들 국왕의 심복들은 현재 왕권복귀운동을 벌이고 있으며「오베이시」장군은 이 때문에 자주 이라크를 출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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