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고 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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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약육강식과 이합집산은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53~221년)의 특징이었다. 일곱 개 나라의 권력들이 충돌하며 동양적 정치질서의 원형을 만들어 가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소진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탐욕스러운 한 강대국에 맞서 다른 여섯 개 나라들을 동맹으로 묶는 외교술을 발휘했다. 남북 종렬로 늘어선 나라들을 합쳤다고 해서 '합종책'이라 했다.

개별 왕국 차원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6국 간 동시신뢰 체제가 소진에 의해 구축됐다. 그는 각 나라의 정승에 올라 여섯 왕을 섬겼다.

소진의 성공은 왕들의 경계를 넘어 중국 천하를 한 묶음으로 보는 시야에서 나왔다. 유세술이라는 전문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춘 것도 중요했다. 유세술의 핵심은 공동의 이해를 정확하게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고건은 고대 중국의 천 년 이야기를 다룬 '동주 열국지'(풍몽룡 저, 김구용 옮김, 12권)를 지인들에게 선물로 돌렸다.

고건은 열국지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등장인물 중 소진과 몇몇 측면에서 비슷하다.

그는 여섯 명의 대통령을 위해 일한 희귀한 인물이다. 대통령들은 저마다 자기의 집권을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 믿었다. 예외없이 자기 입맛에 맞는 정당과 세력을 만들었다. 뒤 정권은 앞 정권의 가치를 부정하기 일쑤였다. 산업화 정권과 민주화 정권 사이에 놓인 심연이 특히 깊었다. 이 때문에 단절과 증오는 어느덧 한국 사회의 천성이 돼 버렸다.

여섯 정권을 거치면서 고건은 통합의 가치와 통합의 기술을 추구했다. 각 정권의 장점을 모으려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면의 분열에 시달리거나 해바라기 시비에 넘어졌을 것이다.

그런 고건이 요즘 정치판 합종연횡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그의 비교우위는 통합적 인간형에 있다. 통합은 전국시대의 소진처럼 공동의 적을 설정해 여러 세력들을 한데 묶는 기술이다.

통합형 정치의 성패는 공동의 적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렸다. 지금 시대 공동의 적은 인간의 세력이라기보다 정체라는 사회현상 아닐까. 여러 세력과 가치들이 각기 제 방향만 고집해 공동체가 한 발짝도 못 움직이는 그런 정체 말이다. 여섯 대통령의 세력과 가치를 겪어낸 희귀한 경험이 정체를 깨는 쪽으로 작용하길 바란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