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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색이름은 색채산업의 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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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색채 관련 산업의 규모가 급성장하면서 낯선 외국어 색이름이 남용되고 있다. 제품의 규격을 표시할 때 크기나 무게 등은 수치로 표시하지만 색채는 언어로 표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색채 규격을 색이름으로 표현하면 그 색채가 어떤 색인지 즉각 연상된다. 그러나 언어적 표현은 부정확하다.

색채 규격을 표시할 때 우리에게 친숙지 않은 색이름을 사용하면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을 초래한다. 따라서 색채 규격을 표시할 때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색이름 중에서 색이름을 듣는 사람들이 연상하는 색채가 사람들 간에 공통성이 높고 안정적인 색이름을 선택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색이름 표준은 1964년에 제정된 바 있다. 이 표준은 일본의 색이름 표준을 번역한 것이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본인에게 친숙한 어휘에 대응하는 우리말 어휘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다. 그래서 64년판 색이름 표준에는 우리에게 생소한 색이름이 다수 포함됐다.

예를 들어 다목물감색.꼭두서니색.연단색.철단색.머룬.번트시에너.말라카이트 그린 등이 그 예다. 우리에게 친숙한 색이름이라도 그 색이름에서 연상되는 색감이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일본인의 '장미색'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미색'보다 조금 더 밝은 자줏빛을 띤다.

색채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64년 판 색이름 표준이 잘못됐음을 지적해 왔으나 근본적 시정이 이뤄지지 못했다. 잘못된 국가 표준이 40년 동안이나 방치돼 온 것이다. 그것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부족하고, 색이름에 대한 연구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체계적인 경험 과학적 연구 자료 없이는 대안을 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 약 15년 전부터 우리말 색이름에 대한 연구가 누적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연구 자료를 토대로 비로소 색이름 표준에 대한 대폭적인 개정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비교적 생소한 26개 색이름을 표준에서 제외했으며, 59개 색이름의 색좌표를 수정했다. 그리고 계통색 이름 체계를 완전히 바꾸었다.

개정된 계통색 이름 체계는 15개 기본색이름과 7개 기본 형용사를 결합해 204가지 색채를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흰색.검은색.회색 등 3개 무채색의 색이름과 빨강.주황.노랑.연두.초록.청록.파랑.남색.보라.자주.분홍.갈색 등 12개 유채색의 색이름이 기본색 이름이다. 이 기본색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색이름이다. 그래서 이들 기본색 이름을 사용하면 색채 규격을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할 수 있다.

좀 더 다양한 색채를 표현하기 위해 기본색 이름을 조합해 노란 주황.황갈색.분홍빛 자주 등 조합색 이름을 만들거나 밝은.어두운.연한.선명한.흐린.탁한 등 7개 기본 형용사를 색이름에 부가해 연분홍.탁한 보라.어두운 회갈색 등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본색 이름과 기본 형용사의 조합으로 색채를 표현하는 방법을 계통색 이름 체계라고 부르며 이것이 색이름 표준의 근간이다. 이 계통색 이름 체계만으로 색채 산업계의 요구를 상당 부분 충족시킬 수 있다. 이 표준 체계를 색채 산업계에서 적극 수용하면 색이름 때문에 생기는 업계 종사자들 간의, 소비자들의 혼란을 크게 줄여줄 것이다.

그러나 계통색 이름 체계만으로 색채 산업계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계통색 이름 204개로는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파랑이긴 한데 '파랑'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세룰리안 블루'가 더 적합한 경우다. 후자는 전형적인 파랑보다는 약간 청록색을 띤 색이다. '어두운 녹갈색'이라고 계통색 이름으로 표현하기보다 '쑥색'이나 '국방색'으로 구분해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거나 편리한 경우도 있다.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해 사용할 수 있도록 색이름 표준에는 133개의 관용색 이름이 포함돼 있다.

이것은 색채 관련 산업계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어떤 색이름을 표준에 포함시킬 것인지는 산업계의 요구와 실증적 연구자료에 근거, 결정되는 것이다. 색이름에 관한 연구와 산업 현장에서의 경험적 평가가 누적되면 그에 따라 표준을 보완해 가는 것이 당연하다. 표준 색이름 체계가 제품의 색채 규격 표시의 혼란을 줄여주고 외국어 색이름의 범람을 막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이만영 고려대 교수(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