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쿠스』재 공연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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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요즈음같이 정치·경제, 그리고 과학이 우리들의 온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예술의 위대함을 감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예술이 웬만한 힘을 가지고는 깡마른 현대인의 정서 속에 감동을 불러일으키기가 점점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한국연극의 경우 더욱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서구연극과는 달리 한국의 연극은 전통이 생기기도 전에 서구문명이 밀어닥치는 소용돌이 속에 지금 그 주축을 마련하느라 애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큰 몫들 담당하는 것이 번역극 상연의 경우다. 작년12월8일부터 실험극장은『에쿠스』를 재 공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연은 벌써 한국에서의 세 번 째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75년 초연 때와 다름없이 기약 없는 롱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여느 연극에서처럼 젊은 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망울은 진지하였고, 그들의 숨소리는 긴장으로 벅찼다.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어있음을 보는 것은 한국연극의 발전을 기원하는 한사람으로 흐뭇한 일이었다.
『에쿠스』는 영국 법정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던져준 26마리 말의 눈알을 쇠꼬챙이로 찌른 마굿간 소년의 괴기적인 범죄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말(마)- 예수-섹스-고통-채찍질의 강렬한 이미지를 극적 구성, 도덕-종교-성-위선-인간관계 등에서 오는 고통과 허망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는 극적 체험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 이 공연이 성공한 이유를 두 가지 관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하나가 어느 유파나 어느 스타일에 얽매임 없이 오로지 무대와 객석사이의 정서교류의 파장을 정확히 터득하여 어린 소년 「앨런·스트렁』(송승환 분)의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무대화한 작가「피터·세퍼』의 기량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또 다른 이유를 우리도 실험극장의 의욕적인 연극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들 연극인은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 과제인 예술의 특수성을 보편화하는데 손색없는 열의를 받침으로 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서투름이 성의와 열기 속에 승화 될 수 있도록 힘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아쉽게 여겨지는 게 있다면 송승환이 연기의 섬세함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발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점이었고. 이승호의 중후한 연기력에 이 연기의 진짜 주인공으로서의 고삐를 제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완숙함이 깃들였더라면 하는 욕심과 아울러 재 공연에 임하는 연극인의 기본자세가 언제고 한번은 제대로 정립되어 본보기를 보여 주었으면 한다. <양혜숙(이대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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