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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공화국|가장 길었던 사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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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16의 포진완료. 그러나 예정된 16일 0시 주력부대는 혼란 속에 있었다. 이 혼란을 모른 채 계획대로 출동한 것은 해병여단과 ×군단 포병단.
계획표 대로면 해병대는 마지막 진입부대. 포병단은 육본에 대기할 예비병력이었다.
해병여단 장병들은 심야 연병장에 집결했다. 김윤근 준장의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선두는 2중대, 맨 뒤는 5중대. 장병을 태운 차량이 연병장을 나선 것은 정각16일 0시.
가장 길었던 3일을 여는 출동부대였다. 이윽고 염창교, 거기엔 박정희 소장을 태운 지프가 대기해있고 그 너머 멀리서 불빛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각 출동하는 공수단이었다.

<"기밀 새 틀렸구나">
부대는 박소장과 김준장이 얘기하는 동안 잠시 멈췄다. 그때서야 해병대가 선두부대라는 사실을 통고 받고 김준장은 당황했지만 혼자만의 당혹으로 간직한 채 행군을 명령했다. (연재1회 참조)
행렬이 한강교 남단에 도착한 것은 예정보다 20분이 늦은 3시20분. 한강인도교엔 육군트럭 2대가 팔자형으로 길을 가로막은 채 멈춰있고 그 옆엔 헌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2중대장 이준섭 대위가 앞으로 다가섰다.
육군참모총장도 참여한 군의 궐기로 알고 있는 이대위로선 그것이 저지군 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헌병대위와 마주쳤다. 이대위가 악수를 청했다. 헌병중대장 김석률 대위도 손을 맞잡았다. 『시내는 아무 이상이 없소』 『우리는 어떤 부대도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라는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있소』
『뭐요. 우리는 해병대 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해병대요. 속히 장애물을 치우시오.』
이 뜻밖의 사태를 지켜보던 대대장 오정근 중령이 행렬의 뒤를 따르고 있는 지휘부로 달려갔다. 『무장 헌병대가 출동해 있읍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비로소 김윤근 준장이 입을 열었다. 『육군에서 비밀이 샌 모양이야. 그대로 돌파하라』 오중령이 나섰다. 『우리는 연천으로 야간훈련을 나가는 길이다. 길을 틔워라.』 『육군 참모총장의 특명이다. 돌아가라.』 헌병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참동안 옥신각신했다..
사격은 어느 쪽이 먼저인지를 알 수 없다. 해병대 트럭이 바리케이드 트럭을 밀쳐내면서 사격은 위협의 선을 넘어 부상자를 낳았다. 중대장 이대위도 부상당하자 2중대가 주춤해졌다. 선두는 1중대로 교체됐다. 숫자와 장비에서 도강부대는 압도적 우세였다. 트럭 2대씩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마지막 제3선이 무너지면서 저지헌병은 물러갔다. 그 때가 새벽 4시8분. 선두해병은 트럭에서 내려 산개된 전투태세로 시가지를 도보로 전진했다.

<카빈총만 든 헌병>
그날 한강의 저지병력은 김석률 대위가 지휘한 헌병 ×중대. 김대위는 16일 0시30분 헌병 1백명을 비상대기 하라는 긴급지시를 받았다. 그 한참 후 다시 내려진 특명은 헌병 50명으로 한강에 저지선을 구축하여 해병대의 진입을 막으라는 것. 그들이 갖춘 장비는 트럭과 카빈소총, 그리고 3천6백발의 실탄. 그 무렵 헌병대 장비는 더 있었지만 이것 역시 지시사항이었다.
이들 헌병중대가 한강저지선 구축을 끝낸 2시20분쯤 장총장의 특명을 받은 제×CID(범죄수사대)대장 방자명 중령(8기·오양물산 대표)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상 마주친 상황은 어림없는 임무였다. 그날 한강철교 위의 증언. O씨(당시의 공수단 대대장)
『서울에 가까와 지면서 만일을 대비해 대원들에게 방독면을 쓰게 했습니다. 마치 원자전에라도 나가는 것 같았읍니다. 목이 타더군요. 「목이 탄다」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그 때 알았읍니다. 출동할 때 갖고 나온 위스키를 병째로 마시는데도 목이 마릅디다. 사실 무서웠읍니다.
한강교에서 권총을 빼들고 있는 헌병대위와 담판을 했읍니다. 이 때 헌병대위 뒤에서 위협사격을 했고 내 부하들도 응사를 한 것입니다. 교전이 오래 끌자 뒤따라오던 수뇌 중에는 자결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위급한 사태였읍니다.』
당시 해병여단장(준장) 김윤근씨의 회고.
『육군헌병이 가로막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앞에 나가 바리케이드를 바라보니 눈앞이 캄캄합디다. 그제서야 오중령에게 <육군에서 기밀이 샌 모양이니 그대로 돌파하라>고 했지요. 육본에 도착해보니 ×군단 포병단이 나와 있는데 보병이 모두 카빈만을 들고있어 경황중에도 웃음이 나옵디다.』
유원철씨 (당시 해병대위 전원호처 차장) 『15일 심야 장교들을 벙커에 소집하더군요. 외부와의 차단이 취해진 가운데 김윤근 준장이 혁명에 나선다고 했고 몇 장교가 질문도 했어요. <육군은 누구며 해병대는 누구누구냐>는 거죠. 출동에선 탱크를 앞세운다는 것이었는데 차질이 생겨 트럭으로 떠났어요. 염창교서 우리와 만난 박소장은<정말 고맙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 했읍니다.
한강 파출소에 도착했을 때 경찰관이 상부명령이라며 제지해 오정근 중령이 권총 1발로 위협사격을 했어요. 한강교전에서 「혁명은 실패다」라고 생각했지요. 한강이 이럴 때 서울중심가는 진압군 배치가 완료되었다고 봐야 했으니까요….』
2진부대로 뒤따르던 공수단장(대령) 박치옥씨의 얘기.
『박정희 소장과 함께 있는데 김윤근 준장이 와서 <작전이 실패한 것 같다>고 보고하더군요. 내가 <무슨소리냐>고 고함치니 박소장이 <공수단으로라도 돌격시키자>고 합디다. 나는 이 대 최재명·이원엽 대령에게 ×관구 사령부로 가서 헌병감 조흥만 준장, 차감 이광선 대령에게 헌병을 철수하도록 설득해보라고 보냈지요. 두분이 나중엔 협조했기 때문에 도강 이후엔 장애가 없었지요.』

<3시30분 육본장악>
같은 시간 ×군단 포병단 역시 주력부대의 혼란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출동이었다. 문재준 대령 지휘하에 대대장 신충창 구자춘 백태하 김인엽 정오경 중령이 자기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윽고 최초의 헌병초소에 다가섰다. 『몇 부대입니까』 『×군단, 야간작전이다』 『상부 연락이 없었는데…』 그러나 대부대 앞에 헌병초소는 장애가 아니었다. 행렬은 서울 시가지로 들어섰다. 너무도 조용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저지도 우군도 없는 상황은 모두를 불안하게 했다.
3시13분 중앙청 앞도 움직임이 없었다. 고립된 출동이란 두려움 속에서도 질주는 계속돼 3시30분 육본에 도착했다. 이곳마저 조용히 진입할 수 있었다.
이 두부대의 손쉬운 서울진입은 수수께끼다. 한강저지 헌병대의 감독책임자 방중령은 말한다.
『당시 헌병대에는 4·19주년 민중소요를 대비한 두루마리 철조망, M1소총도 있었어요. 장총장은 이 장비 사용을 금하고 화력이 약한 카빈소총만 사용하라는 겁니다. 당시 남산엔 공병대가 주둔해 있었어요. 그래서 <공병대를 동원해 강변에 배치하지요>라고 건의했더니 <그것도 안돼>였읍니다. 참 이상한 작전명령도 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나왔읍니다. 이 의문은, 그 뒤 내나름으로 풀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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