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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그릇, 한국 본차이나의 역사를 쓰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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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식기가 되다

20년 전만 해도 결혼을 준비하는 여자들의 필수 혼수 아이템은 바로 한국도자기의 홈세트였다. 홈세트를 설명하자면 밥공기, 국그릇, 반찬그릇 등 한식기로 구성한 세트인데 한창 주가를 올리던 때가 있었더랬다. 한국도자기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시절이 오기까지 한국도자기의 이야기는 파란만장하다.

1943년 김종호 창업주는 청주에 충북제도사라는 이름으로 도기 공장을 연다. 국민의 밥상에 오르는 그릇은 투박한 막그릇이 전부인 때, 김종호 창업주는 하얀 도기 대접을 만들고 파란색 띠를 둘러 기쁠 희, 복 복 등 행운을 기원하는 한자를 적어 판매했다. 지금으로 치면 코리아 레트로 디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고 다시금 도기 사업을 시작하며 김종호 창업주는 한국도자기로 상호를 바꾼다.

“허름한 공장에 한국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붙으니, 지나가는 사람, 동네 사람 모두 비웃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할아버지는 상호 그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기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도자 사업의 물꼬를 튼 한국도자기는 2대 김동수 회장이 아버지의 도자 사업을 물려받으며 전환기를 맞는다. 평범한 도자기 브랜드의 도약에 대한 에피소드를 듣고 있자니 참 흥미롭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김동수 회장에게 육영수 여사로부터 만나자는 호출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된 마음으로 찾아갔더니 육영수 여사가 묻더란다.

“지금 청와대에서는 일제와 영국제 그릇을 사용합니다. 국빈에게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한국산 본차이나 그릇을 생산할 수 있나요?”

본차이나는 도자기 종류 중 하나로 쇠뼈를 갈아 원료로 사용하여 만든 도자기를 말한다. 일반 도자기에 비해 얇고 가벼운데도 견고하면서 맑은 빛이 돌아 고급 도자기로 분류된다. 그길로 김동수 회장은 본차이나 개발에 전력을 쏟는다.

“한국에 선례가 없었으니 본차이나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본차이나의 기본 재료가 쇠뼈예요. 근데 한국은 쇠뼈를 끓여서 먹으니 원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죠. 일본에 직접 기술을 배우러 갔더니, 알려주지 않더래요. 그래서 종주국인 영국에 직접 가서 기술을 배워오고 영국의 본애시를 수입해와 본격적으로 본차이나라는 도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지요.”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김영은 사장의 설명이다. 생산 시설을 갖추자마자 청와대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김동수 회장은 청와대에 납품하기 위해 1,000개의 커피잔 생산에 들어갔지만, 그중 간신히 완성시켜 납품할 수 있는 것은 50개 남짓이었다.

“지금 보면 정말 형편없지요. 잔에 금이 가고, 색도 거무튀튀하고요. 하지만 당시에는 국내 최초 본차이나라는 소재로 그릇을 만들어낸 회사였어요.”

이후, 영국과 기술 교류를 통해 본차이나 기술력을 높여갔고 대통령의 식기를 납품하는 유일한 회사가 되었다. 대통령 식기의 디자인은 영부인의 취향을 반영했다.

육영수 여사는 초롱꽃으로 디자인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고.

“지금도 회장님은 박근혜 대통령을 근혜 양이라 불러요. 아마 그때 육영수 여사 옆에 앉아 있던 소녀의 이미지가 각인되어서겠죠. 이순자 여사는 화려한 꽃무늬를 좋아해 화려함이 가장 돋보이는 식기를 만들었어요. 식기의 구성도 정권마다 달라요. 티타임을 즐기던 김옥순 여사는 특별히 찻잔 세트에 더 신경을 쓰기도 했어요. 한국도자기가 그동안 만들어낸 대통령 식기는 곧 영부인들의 취향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 그릇의 새로운 변주

식문화는 분명 변했다. 온 가족이 복닥복닥 모여 앉아 밥을 먹는 풍경은 명절처럼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보기 힘들어졌고 밥과 국이 아닌 빵, 파스타가 식탁에 올라와 끼니를 대신해도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이런 흐름에 따라 한국도자기의 홈세트는 구성이 좀 더 간결해졌고, 최근 출시된 더 셰프 라인에는 밥공기, 국그릇 등의 한식기 구성에 달라진 식문화를 반영해 디저트 볼, 파스타 접시를 더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3대를 이어가는 3남매 중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진취적으로 펼치는 막내 딸 김영은 사장의 공이 컸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과거의 향수에만 머물다간 발 빠른 시장에서 금방 뒤처지고 잊히겠죠. 그래서 과거의 향수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것이 방법인 것 같아요. 모두에게 인정받은 옛것의 명성과 품질은 그대로 이어가되, 현대적인 트렌드를 접목시키는 거죠.”

김영은 사장의 머릿속 아이디어와 계획은 하나둘씩 현실이 되어가는 중이다. 한국도자기의 현재 그리고 지향하는 바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얍(yab) 시리즈. ‘Young Artist Project’에서 따온 약자이면서도 ‘얍!’ 하며 기합을 넣는 의성어이기도 한 얍 시리즈는 한국도자기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가나아트센터 소속 신진 작가 4인의 팝아트 회화를 도자기에 표현해낸 프로젝트다.

지난해 얍 시리즈에 이어 올해에는 셰프들과 협업하여 더 셰프 라인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셰프들이 만드는 음식부터, 그들의 조리 도구까지 마치 연예인처럼 대중에게 인기가 많잖아요. 그건 아마 우리가 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다는 방증인 것 같아요. 분명 같은 도구이고 그릇인데 셰프가 쓰면 어쩐지 더 근사해 보이잖아요. 한국도자기를 직접 사용하는 셰프들이 기존의 한국도자기 제품에서 맘에 드는 물건을 골라 더 셰프로 재구성한 거예요. 기본적으로 백자인데도 밋밋하지 않고 그릇이 모두 잘 어우러지기 때문에 플레이팅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프라우나 라인은 2004년부터 진행해오던 한국도자기의 고급 라인이다. 예술성 높은 디자인과 100%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크리스털 세공, 핸드메이드 기법이 만나 생활 자기를 예술로 승화시킨 식기로서 주로 외국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라고. 김영은 사장이 한국도자기의 전통을 고증하는 방식은 여러모로 새롭다. 전통적이면서도 기본적인 도기 그릇에서 탈피해 예술 작품을 컵, 그릇에 그대로 담아내어 벽에 걸리는 그림 형식의 작품이 아닌 실생활에서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또 골드, 크리스털을 이용해 수작업하여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다시금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쩐지 그녀의 방식에 적당한 파격이 느껴진다. 김영은 사장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무리 없이 척척 진행할 수 있는 이유는 71년 전통과 기술력을 갖춰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 자기에 정교한 그림이나 문양을 옮기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사 기술,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본차이나 소재라는 삼박자가 한국도자기의 탄탄한 기본 하드웨어이기 때문이다.

김영은 사장이 계획하고 진행하는 모든 협업 프로젝트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고, 한국도자기의 제품을 색다르게 재해석할 수 있다는 그녀의 열린 마인드가 주춧돌 역할을 하는 셈이다.

식문화를 뛰어넘다

김영은 사장의 집무실은 그야말로 한국도자기의 과거와 미래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그릇장에는 초롱꽃이 단정하게 그려진 박정희 대통령의 주병이, 책상 서랍을 열면 그동안 한국도자기 디자인의 흐름을 보여주는 아트워크가, 창틀에는 앞으로 협업해보고 싶은 마음에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젊은 작가의 그림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이야기가 쌓여 더 멋스러운 그릇과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새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것. 마치 옛것과 새것을 적절히 버무려 전통을 이어가는 한국도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친정어머니가 평생 잘 관리하라며 하나하나 내주신 것들이에요. 한국도자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어머니가 제게 물려주신 소중한 대물림 물건들이죠.”

김영은 사장은 대물림의 가치가 있는 물건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두고 있다. 첫째는 오래 두어도 가치를 더해가는 훌륭한 퀄리티, 둘째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 셋째 실용적이고 쓰임새가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생활 명품이 될 수 있고 자연스레 물려줄 수 있는 대물림 물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물건을 대물림했듯, 한국도자기 제품이 대물림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치 있는 물건이 되길 바란다.

한국도자기는 그릇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시작했지만, 앞으로 본차이나라는 훌륭한 소재를 앞세워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아우르는 제품군을 늘려갈 계획이다.

“본차이나라는 소재가 얼마나 훌륭한지 아세요? 주방 조명의 갓이 될 수도 있고, 공명이 좋고 가벼워서 스피커를 만드는 데 쓰일 수도 있어요. 본차이나로 그릇을 뛰어넘는 물건들을 개발하고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김영은 사장은 대물림의 가치가 있는 물건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두고 있다. 첫째는 오래 두어도 가치를 더해가는 훌륭한 퀄리티, 둘째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 셋째는 실용적이고 쓰임새가 좋아야 생활 명품이 될 수 있고 대물림 물건이 된다는 것이다.그녀는 어머니가 물건을 대물림했듯, 한국도자기 제품이 대물림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치 있는 물건이 되길 바란다.

기획=최선아 레몬트리 기자
사진=전택수(JEON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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