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적인 베토벤 그려보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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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우리들의 서독행은 초장부터 기분이 잡쳤다. 「괴테」의 고향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재수 없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도 독사에 물린다」고 들어서자마자 문간에서 제지를 당한 것이다.
우리는 공항세관을 지나 패스포트를 검사하는 창구 앞에 섰다.
운보가 여권이 없다고 이 호주머니 저 호주머니를 샅샅이 뒤졌다. 아무리 찾아도 여권은 없었다. 이번에는 가방을 이 잡듯이 뒤졌다. 땀이 비오듯했다. 물건을 차례차례 꺼내놓고 구석구석 살펴봤다.

<20분간 숨바꼭질>
여권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지 꼭꼭 숨어 있었다. 찾지 못했다. 검사원들은 눈이 둥그래져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 여겨 보고있었다.
여권 찾기 작업을 20분이나 반복했을까…. 초조하기까지 했다. 운보는 비행기에 두고 내렸는지 모르겠다고 가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점검했다. 패스포트는 운보의 손가방 속에서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게 잠자고 있었다.
뛸 듯이 기뻤다. 운보것과 기자의 것을 동시에 내밀었다.
어찌된 일인지 여행목적지에 「저머니」는 빠져있었다. 글자를 한자씩 훑어 내려가도 저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이 무슨 실수란 말인가….
사무실로 끌려갔다. 비행기표를 내놓고 사무착오라고 항의했다.
깐깐한 독일 사람에게 이 같은 변명(사실이긴 해도)이 통할 리 만무였다. 이 우환 중에도 문득 「독일병정」이란 말이 생각났다. 오죽했으면 매사를 원리원칙대로 취급하는 사람에게 「저먼·솔저」란 별명을 붙였을까 생각하고 변명을 단념, 진로를 북북서로 돌렸다.
방법을 바꾸어 이번에는 일시체류를 제시했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한독미술가협회 사무국장 김희일씨가 들어왔다.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김희일씨가 나서서 체류증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1시간이 넘었는데도 하물취급소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우리 짐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얼마나 가슴을 죄었는지 소변까지 노랗다. 밥맛도 없었다. 목이 타서 핑계김에 술만 꿀꺽꿀꺽 마셨더니 금세 취기가 돌았다.
이튿날은 김희일씨 안내로 한독미술가협회 서독회장 「비트」씨 집을 찾아갔다.
운보가 한국회장이어서 의례적인 방문이 되었다.
「비트」씨는 왕손으로 서독의 토호였다. 집안치장도 잘해 놓았지만 정원도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바로 어젯저녁에 파티를 했다고 정원 이곳저곳에 원탁이 놓여있다. 몇 만명은 넉넉히 수용할 수 있는 장원이다. 한 마을(비트시)이 모두 「비트」씨의 소유라니 그 부는 묻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대단한 미술애호가였다. 집안 어디를 가나 명화가 즐비했다. 그것도 할아버지가 독일제일의 화가를 데리고 세계일주 여행을 하면서 그린 그림들이어서 운보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토호의 장원에서>
이 집서 귀한 손님이나 와야 내놓는다는 몇 십년 묵은 포도주를 대접받았다. 「비트」씨 집에서 선물로 할아버지가 세계 일주한 이야기와 화가의 그림을 곁들인 여행기를 받아 가지고 나왔다.
우리는 김희일씨의 벤츠를 타고 라인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라인강은 독일은 물론, 네덜란드·스위스까지 이어지는 1천3백km가 넘는 장강이다. 라인강은 독일 안 만해도 8백km에 걸쳐 유유히 흔르고 있다.
오늘날 서독의 부흥을 일컬어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이유도 알겸 스케치를 하려고 라인강의 관광코스를 따라 올라갔다.
모젤강과 라인강이 합류하는 삼각지 코스랜스에 차를 멈췄다.
이곳에 「비스마르크」동상이 서있다. 동상은 2차 대전 중에 폭격을 맞아 없어지고 지금은 축대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축대만으로도 서슬이 퍼렇던 「비스마르크」의 모습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사복을 입고 베를린시내를 아무리 활보해도 경례하나 붙이는 사람이 없음을 개탄하고 집에 돌아와 옷장에 걸려있는 자신의 정장을 보고 『「비스마르크」는 내가 아니라 너였구나』했다는 그의 일면을 상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 몇장의 스케치를 하고 말로만 듣던 로렐라이 언덕에 갔다.
1백20m나 되는 넓은 강폭이 갑자기 굽이쳐 옛전설에 얽힌 바위가 강류를 막은 듯 우뚝 버티고 서있다.
라인강 제일의 명승지로 꼽히는 이곳은 표고 l백94m의 암산-. 정상에는 로렐라이에 얽힌 전서을 모티브로한 상이 있는 산악호텔과 옥외극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로렐라이 거암 밑을 뚫어 터널 속으로 기차가 달린다.
밑에서 보면 금세 인어여의 전설이 되살아날 것 같다. 인어모양을 한 마녀가 로렐라이 언덕을 통과하는 배를 세우고 유혹했다는 이야기는 지금 노래로 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산마루에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산업은행에 근무하는 교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운보를 알아보고 반겼다. 알뜰히 준비한 도시락을 같이 들자고 청해 나누어 먹었다. 무엇보다 집에서 담가 가지고 온 김치가 맛있어 염치없이「마파람에 게눈 감추듯」먹어 치웠다.

<「알펜」의 맥주 맛>
「하이네」의 시로 된 노래를 들으며 로렐라이 언덕을 내려와 「비스마르크」평화탑이 서있는 곳에 이르렀다.
『하느님이 독일국민에게 준 망을 지키고, 라인강을 지키고, 평화를 달라』는 내용의 비문이었다.
이곳에는 독일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많았다. 종류만도 1백이 넘었다. 부엉이도 소쩍새도 있었다. 운보는 득의해서 화필을 들고 독수리·부엉이 묘사의 1인자답게 스케치북을 메워나갔다.
우리는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로 갈까하다 시간이 없어 본으로 돌아왔다.
라인강가 유로파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호텔 앞에 병풍처럼 산이 펼쳐져 있었다.
용바위가 우뚝했다. 왕자가 용을 죽여 용이 보복했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이 이야기는 게르만의 영웅 서사시 「니벨퉁겐의 노래」에 나오는 신화란다.
운보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어떻게 동양화로 표현할까 고심했다.
우리들이 묵은 호텔은 경관이 좋았다.
앞에 거인장사들이 내기해서 만들었다는 칠산도 있고 「히틀러」별장도 있었다.
운보는 본에서 아무리 일정이 급해도 「베트벤」집에는 꼭 가야한다고 했다.
「베토벤」의 집은 본 구시가의 북부, 본 가세라는 골목에 있다. l770년「베토벤」이 태어난 이 집에는 현재 기념관으로 유품·자료·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운보는 여기 걸려있는 초상화를 보고는 자신의 손으로 동양적인 「베토벤」의 초상화를 그렸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우리는 높이 1백57m의 거대한 두 철탑을 가진 고딕 건물로 독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쾰른의 대망당도 보았다.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알펜지방에가서 맥주를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 2차 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레마겐 철귤이야기를 들었다.
레마겐철교는 라인강 둑에 시커먼 잔해만 남기고 을씨년스럽게 나동그라져 있었다. 글=이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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